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인조 시대 활동]
1628년(인조 6) 별시(別試)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이때 아버지 박동량이 아직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지 않았으므로, 그를 해치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는 조금도 안색에 드러내지 않았다. 이내 성균관(成均館)학유(學諭)를 거쳐 전적(典籍)을 역임하고 직강(直講)에 이르렀다. 그 사이에 병조 좌랑(佐郞)이 되었다가 흥양현감(興陽縣監), 간성군수(杆城郡守)가 되었다. 1629년(인조 7) 5월에는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선발되었다. 그 후, 홍문관(弘文館)으로 들어가 수찬(修撰)이 되고, 1641년(인조 19) 1월에 교리(校理)가 되었다. 이때부터 4년간 홍문관을 떠나지 않았고, 잠시 1643년(인조 21) 1월에 사헌부 장령이 되었으니,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말할 수 없다. 1644년(인조 22) 9월 26일 향년 45세로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는 『중봉집(中峯集)』이 있다.
[성품과 일화]
영의정 신흠 부자(父子)와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 장유(張維) 등이 그의 재능과 행실을 칭찬하였는가 하면 동료들이 차례로 그를 추앙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뜻은 초연(超然)히 세속을 떠나 초야의 처사(處士)들과 고결을 다투려고 하였으니, 그의 숭상하는 바가 달랐었다고 한다.
박의에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큰 가문의 아들로 일찍부터 사치스러운 생활을 사절하고 시서(詩書)를 배웠다. 그런데 가화(家禍)와 국난(國難)이 겹치자, 머리를 숙이고 배회하며 혼자 살면서 인(仁)을 생각하려는 뜻을 항상 가졌다. 그는 젊어서 경전(經傳)과 염락(濂洛) 등의 여러 글을 읽었기 때문에 집에 있을 때나 벼슬할 때 나타나는 것들이 모두 배움 속에서 우러나왔다. 송시열(宋時烈)은 “그를 뵈었을 때를 돌이켜 상상해 보건대, 고결하게 바르면서 그 속에 사물이 있고 온화하게 접하면서도 법도가 있었는데, 모르겠지만 이것이 사실과 틀리지 않을 것으로 여긴다.”라고 그에 관하여 말하기도 하였다.
[비문]
송시열(宋時烈)이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첫째부인 평산신씨(平山申氏)는 영의정 신흠의 딸이고, 둘째 부인 강릉최씨(江陵崔氏)는 최영(崔嶸)의 딸이다. 자녀는 2남 1녀인데, 큰 아들은 박세래(朴世來)인데, 일찍 죽었고, 둘째 아들은 화숙(和叔) 박세채(朴世采)이며 딸은 이항(李恒)의 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