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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79년(성종 10)~1504년(연산군 10) = 26세]. 조선 중기 연산군 때에 활동한 학자 · 시인. 행직(行職)은 홍문관(弘文館)수찬(修撰)이고, 증직(贈職)은 도승지(都承旨)이다. 자는 중열(仲說)이고, 호는 읍취헌(挹翠軒)이다. 본관은 고령(高靈)인데, 아버지는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 박담손(朴聃孫)이고, 어머니 경주이씨(慶州李氏)는 제용감(濟用監)직장(直長) 이이(李苡)의 딸이다. 이조 판서 겸 예문관(藝文館)대제학(大提學)인 신용개(申用漑)의 사위이다.
[연산군 시대의 활동과 갑자사화]
1495년(연산군 1)에 사마시(司馬試)에 진사(進士)로 합격하고, 1496년(연산군 2)에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합격하였다. 이 해 12월에 이조에서 사가독서자(賜暇讀書者) 14인을 선발하였는데 이에 뽑혔다. 그 뒤에 곧 승문원 권지정자(權知正字)로 보임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홍문관에 선발되어 정자(正字)가 되었고, 1498년(연산군 4) 윤11월에 홍문관 저작(著作)이 되었다. 1500년(연산군 6) 3월에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이 되었고, 1501년(연산군 7) 4월에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 경연(經筵)에 5년간 있으면서 정사의 결점을 보완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 불가한 일이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먼저 말하여 조금도 회피하지 않으니, 연산군이 상당히 꺼렸고 재상들도 좋아하지 않았다.
20세의 약관으로 유자광(柳子光)의 음험하고 사특한 상황과 성준(成俊)·이극균(李克均) 등이 유자광에게 아첨함을 지탄하는 소를 동료들과 올렸으나 오히려 그들의 모함을 받았다. 평소 직언(直言)을 꺼린 연산군은 다른 일로 얽어 그와 동료들을 모두 하옥(下獄)하였다. 옥관(獄官)이 그들의 눈치를 보면서 자백을 받으려고 온갖 방법을 다 했으므로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그 혼자 바른대로 대답하였고, 이로 인해 파직되었다. 이때부터 자신이 세속의 사람들에게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산수(山水)에다 뜻을 붙이고 주야로 글과 술을 즐겼다. 그가 지은 글은, 모두 사람의 상상을 뛰어넘어 마치 사물이 와서 도와준 것 같다는 평을 들었다. 그가 읽지 않은 서적이 없는데다가 총명하고 기억력이 좋아, 상하 고금의 인물을 평론할 때면, 기개의 고하(高下), 사업이 순박(醇駁), 문장의 정변(政變)으로부터 예문(禮文)의 손익(損益), 풍속의 이동(異同)에 이르기까지 두루 해박하게 알았는데, 마치 좌우에서 취하듯이 하여 조금도 빠뜨리지 않았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시원스럽게 여겼다. 또 요량(料量)을 잘하여, 사람들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난처해하는 것을 갑자기 물어도 잘 응답하였고, 그 말대로 시행해 보면 타당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1503년(연산군 9) 봄에 산관(散官)으로 학직(學職)을 겸임하였고, 1504년(연산군 10) 봄에 지제교(知製敎)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갈 뜻이 없었다. 이 해 여름 4월 <갑자사화(甲子士禍) >가 일어나서 동래현(東萊縣)으로 유배갔는데, 귀양간 지 백일이 안 되어 한양의 옥사(獄舍)로 잡혀와 혹독한 고문을 받다가 6월 15일 결국 형장(刑場)에서 사형을 당하니, 그의 나이 26세였다.
저서로는 『읍취헌유고(挹翠軒遺稿)』가 있다.
[성품과 문장]
박은의 자질과 성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글을 잘 배워서 약관(弱冠)에 학문이 성취되었다. 마음 씀이 바르고 몸가짐이 간결하였으며 부모를 안색에 맞추어 봉양하고 여러 누이 동생과 처자(妻子)를 온화하게 대하였다. 벗과 사귈 적에 신의를 지키되 구차스럽게 하지 않았으며 남의 선행을 보면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여겼었고, 나쁜 것을 보면 자신을 더럽힐 것처럼 하였다. 문장(文章)에 있어서는 타고난 것이 높고 생각이 샘솟듯 하여 한 때의 글 잘하는 선비가 다 스스로 미치지 못한다고 여겼다.
『정조실록(正祖實錄)』 정조 19년 10월 14일(신묘)조 기사를 보면, 정조가 그에 관하여 “우리나라의 시(詩) 가운데에서는 오직 고(故) 교리(校理)박은(朴誾)과 증이조 판서(贈吏曹判書) 박상(朴詳) 두 사람의 시가 있다는 것을 알 뿐이다.”라고 평가하였다. 또 『명종실록(明宗實錄)』명종 17년 2월 25일(기묘)조 기사를 보면, 당시 대제학이던 정유길(鄭惟吉)은 박은에 관하여 “김종직(金宗直)은 학문이 정미하고 시문(詩文)도 모두 잘하였다. 김종직의 뒤로는 이행(李荇)의 시(詩)가 훌륭하였다. 박은(朴誾)의 시(詩)와 김일손(金馹孫)의 문(文)도 그 짝을 찾기가 힘들다.”라고 평하였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경기도 양지현(陽智縣)의 남쪽 금곡촌(金谷村)에 있다. 이행(李荇)이 묘지명(墓誌銘)을 지었다. 1504년 세상을 떠난 3년 후에 신원되고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부인 고령신씨(高靈申氏)는 이조 판서 겸예문관 대제학 신용개(申用漑)의 딸인데, 자녀는 4남 2녀를 두었다. 큰 아들은 박인량(朴寅亮)이고, 둘째 아들은 박대춘(朴大椿)이며, 셋째 아들은 박대붕(朴大鵬)이고, 넷째 아들은 박동숙(朴同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