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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370년(공민왕 19)~1422년(세종 4) = 53세]. 고려 말 우왕·창왕·공양왕과 조선 초기 태조·정종·태종·세종 때에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좌의정이다. 자는 앙지(仰止)이고, 호는 조은(釣隱)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인데, 아버지는 전교시(典校寺) 판사(判事)박상충(朴尙衷)이고, 어머니 한산이씨(韓山李氏)는 도첨의(都僉議) 찬성사(贊成事) 이곡(李穀)의 딸이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외숙(外叔)이다.
[고려말 우왕 · 창왕 · 공양왕 시대의 활동]
나이 9세 때에 문음(門蔭)으로 숭복도감(崇福都監) 판사에 임명된 뒤, 1385년(고려 우왕 11)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1388년에 대과(大科)를 보아 병과(丙科) 2등으로 급제하여 권지 전교시 교감(權知典敎寺校勘)이 되었다. 그 뒤 누차 전직되어 후덕부(厚德府) 승(丞)이 되었고, 1391년(공양왕 3)에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 1392년(공양왕 4)에 개성부 소윤(開城府少尹)이 되었다.
[조선 태조 · 정종 · 태종 · 세종 시대의 활동]
1392년 7월에 태조가 조선을 개국할 때, 금주지사(錦州知事)로 나갔다가 얼마 안 되어 정사의 고과(考課)에 최고 점수를 맞아 좌보궐(左輔闕) 겸 지제교(知製敎)가 되었다. 1394년(태조 3)에 외임으로 나가 영주지사(永州知事)가 되었다. 그때 대군(大君)으로 있던 태조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李芳遠)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약속하였다. 1397년(태조 6) 사헌시(司憲侍) 사(史)가 되었는데, 계림부윤(鷄林府尹) 유양(柳亮)에 관계된 일로 인해 정권을 쥔 사람의 뜻을 거슬려 다시 외임 직인 춘주지사(春州知事)가 되었다.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 춘주지사로 이방원의 집권을 위하여 지방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르자 이방원이 머물러 대책에 참여하도록 하였고, 이어 사헌부(司憲府) 중승(中丞)에 임명하였다.
1399년(정종 1)에 사수감(司水監) 판사가 되었다가, 곧 형조 지사(知事)가 되었고, 1400년(정종 2) 1월에 회안군(懷安君) 이방간(芳幹)과 박포(朴苞)가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자 역시 이방원을 도와 공을 세웠다. 이 해 2월에 이방원이 왕세제(王世弟)로 책봉(冊封)되면서, 인녕부(仁寧府) 좌사윤(左司尹)과 세자좌보덕(世子左輔德)이 되었다가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되어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보문각(寶文閣) 직학사(直學士)가 되었고, 8월에 충주목사(忠州牧使)로 나갔다.
[조선 태종 · 세종 시대의 활동]
1400년 11월에 태종이 즉위하자 형조 전서(典書), 수문전(修文殿) 직학사가 되었다. 1401년(태종 1)에 호조 전서, 병조 전서, 이조 전서를 역임하고, 추충익대좌명공신(推忠翊戴佐命功臣)이 되었으며, 반남군(潘南君)에 봉해졌다. 1402년(태종 2) 1월에 강원도 도관찰출척사(江原道都觀察黜陟使)가 되었고, 1403년(태종 3)에 한성부윤(漢城府尹)이 되었다가 승추부(承樞府)제학(提學)이 되었다. 1404년(태종 4)에 반성군(潘城君)에 책봉되었다. 1406년(태종 6) 1월에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되었다. 그때 마침 명(明)나라에서 환관(宦官) 황엄(黃儼)을 보내어 제주(濟州)의 동불상(銅佛像)을 요구하였다. 황엄이 탐욕스럽고 포학하여 여러 도에서 지레 겁을 먹었는데, 그가 혼자 예(禮)로 대우하자, 황엄이 감히 횡포를 부리지 못하였다. 황엄이 한양에 돌아와서 태종에게 아뢰기를, “전하의 충신은 오직 박은뿐이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좌군도총제부(左軍都摠制府) 동지총제(同知摠制), 집현전(集賢殿)제학(提學)이 되었다. 이듬해에 진향사(進香使)로 연경(燕京)에 다녀온 뒤인 1408년(태종 8) 10월에 의정부 참지사(參知事)에 임명되어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을 겸임하였다. 이때 좌의정(左議政) 하윤(河崙)이 모든 일을 자신의 뜻대로 처리하였으므로 우의정(右議政) 이하는 다만 서명만 할 따름이었다. 그는 일이 옳지 못한 것이 있으면, 하윤의 앞에 나아가서도 옳지 않다는 것을 역설하다가, 자기의 의견을 받아주지 아니하면 서명을 하지 않았으므로 하윤이 매우 꺼려하였다. 이 해 12월에 형조 판서로 전직되었다가 1409년(태종 9) 2월 중순에 미미한 일로 파면되었다. 이 달 말에 반성군(潘城君)이 되었다. 이 해 보문각 제학 겸 의용순찰사사(義勇巡察司事)가 되었다가 12월에 서북면 도순문찰리사(西北面都巡問察理使) 겸 평양부윤(平壤府尹)으로 나갔다. 1410년(태종 10) 왕명을 받아 평양성(平壤城)을 수축하였다. 이 해 11월에 의정부 지사가 되었다가 12월에 병조 판서가 되고, 1411년(태종 11) 7월에 다시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가 8월에 호조 판서가 되었었는데 이 해 윤12월에 사직하였다. 1412년(태종 12) 12월에는 그의 청에 따라 본향(本鄕)인 반남이 나주(羅州)에 속하게 되어 금천군(錦川君)으로 다시 봉해졌다. 1413년(태종 13) 10월에 의정부 참찬사(參贊事)로 의용순금사(義勇巡禁司) 판사를 겸임하였다. 이때 대벽(大辟: 사형)의 삼복법(三覆法)을 시행하였으며, 옥사를 처리할 때 신장(訊杖)의 수를 한 차례에 30대씩으로 정하여 합리적인 형정제도를 시행하였다. 1414(태종 14) 8월에 의금부(義禁府)제조(提調)가 되었고, 1415년(태종 15) 6월에 이조 판서가 되었다. 1416년(태종 16) 3월에는 47세의 나이로 중군(中軍) 도총제부(都總制府) 판사가 되고, 이 해 5월에 의정부 우의정이 되어 금천부원군(錦川府院君)으로 책봉되었다. 11월에 좌의정이 되어 이조 판사를 겸하였다. 1417년(태종 17) 12월에 춘추관 영사(領事)를 겸임하였다.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세자로 책봉될 무렵부터 심온(沈溫)과 대립하였으므로, 1418년 <심온의 옥사> 때에는 심온과 반대되는 입장에서 관여하였다는 세평을 듣고 있다. 1418년(세종 즉위) 8월에 좌의정 경연 영사가 되었다. 이 해 10월 7일 처음으로 경연(經筵)을 열었는데, 나아가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론하였다. 1419년(세종 1) 2월에는 문신(文臣)을 선발하여 집현전에 모아 문풍(文風)을 진흥시키는 것과 자제(子弟)들이 사서(四書)를 통달한 뒤에라야 무과(武科)에 응시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줄 것을 요청하여 세종이 아름답게 여기고 받아들였다. 1420년(세종 2) 3월에 집현전에 새로 베푼 영전사(領殿事)가 되었다. 1421년(세종 3) 5월에 세종의 명을 받고 대열(大閱)의 제도를 다시 정하였다. 이 해 12월에 병이 위중하여 좌의정을 사직하고 집에 물러나 요양하다가 1422년(세종 4) 5월 9일 향년 53세로 세상을 떠났다.
[성품과 일화]
박은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도량이 출중하였다. 6세에 부모를 모두 여의고 외롭게 자라다가 조금 장성하자 스스로 분발하여 독서할 줄을 알았으므로, 외숙(外叔)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시(詩)를 지어 그 기쁨을 표현하였다 한다.
또 그는 자질이 비범하고 식견이 명석하며 언론이 확실한데다가 청렴하고 근신하며 부지런하였다. 그리하여 내외의 직을 역임하면서 업적이 아주 많았는데, 젊어서부터 이미 태종(太宗)의 인정을 받았고, 위난(危難)의 때를 만나면서 충성이 더욱더 드러났다. 이때부터 태종을 측근에서 보필하였고 태종의 은총도 특별하여 군국(軍國)의 대계(大計)와 관계되는 일은 반드시 같이 의논하였다 한다.
[묘소와 비문]
시호는 평도(平度)이다. 묘소는 원래 경기도 양주(楊州)의 치소(治所) 남쪽 중량포(中良浦)에 있었는데, 나중에 경기도 광주(廣州)의 치소(治所) 북쪽 고다기리(高多岐里)로 이장하였다. 박세채(朴世采)가 비명(碑名)을 지었다. 부인 주씨(周氏)는 전법판서(典法判書) 주언방(周彦邦)의 딸인데, 자녀는 3남 4녀를 두었다. 1남 박규(朴葵)는 경상도관찰사이고, 2남 박강(朴薑)은 좌익공신(佐翼功臣) 금천군(錦川君)이며, 3남 박훤(朴萱)은 경주부윤(慶州府尹)이다.
1녀는 부사(府使) 윤구(尹救)의 처가 되었고, 2녀는 상호군(上護軍) 김윤(金潤)의 처가 되었으며, 3녀는 관찰사 이중(李重)의 처가 되었고, 4녀는 중추부 판사 어효첨(魚孝瞻)의 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