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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76년(성종 7)~1547년(명종 2) = 72세]. 조선 중기 중종·인종·명종 때에 활동한 문신. 행직은 전주부윤(全州府尹)이고, 증직(贈職)은 영의정(領議政)이다. 자는 창방(昌邦)이고, 호는 육봉(六峯)이다. 본관은 충주(忠州)이데, 아버지는 증 병조 참판 박지흥(朴智興)이고, 어머니는 계성서씨(桂城徐氏)이다. 큰형 박정(朴禎)에게 글을 배웠다. 영의정을 지낸 박순(朴淳)이 그 아들이다.
[중종 시대의 활동]
1507년(중종 2) 2월 사마시(司馬試)에 진사(進士) 수석을 차지하였는데, 이때부터 학문이 더욱더 풍부해지고 명성이 더욱더 크게 났다. 1510년(중종 5)에 식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교서관(校書館)에 소속되었다가, 얼마 후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임명되었고, 대교(待敎), 봉교(奉敎)를 거쳐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이 되었다. 어머니가 연로(年老)하였기 때문에 외직을 요청하여 흥덕현감(興德縣監)으로 나갔다.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여 사직하였는데, 삼년상이 끝나자, 다시 전적이 되었다가 관동관찰사(關東觀察使) 막하의 보좌관으로 나갔다. 조정으로 들어와 호조 정랑(正郞)이 되었다가, 1522년(중종 17) 10월에 홍문관(弘文館)교리(校理)가 되었다. 경연(經筵)에서 학문을 강론하면,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이 진퇴(進退)하고 소장(消長)하는 관계와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이 들고 나며 위미(危微)해지는 기틀과 옛날 제왕(帝王)의 치란(治亂)과 흥망(興亡)한 연유에 대해 반드시 반복해 미루어 밝혔는데, 말뜻이 간결하고 간곡하여 중종(中宗)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3년 뒤에 병으로 사직하자 공조 정랑과 병조 정랑으로 전직되었다.
1525년(중종 20) 3월에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고, 6월에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었는데, 간곡히 사양하자 성균관 사예(司藝)로 임명되었다. 며칠 후 6월에 다시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가가 특별히 사간(司諫)에 임명되었다. 1526년(중종 21) 10월에 홍문관 부응교(副應敎)가 되었고, 1527년(중종 22) 3월에 홍문관 전한(典翰)이 되었으며, 그 해 10월에 홍문관 직제학(直提學)이 되었다. 1528년(중종 23) 8월에 선위사(宣慰使)가 되었다. 1529년(중종 24) 6월에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다가 부윤(府尹)이 되었고, 1531년(중종 26) 3월에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었다.
1532년(중종 27) 5월에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가 되었는데, 병으로 인해 사직하고 돌아왔으나, 1533년(중종 28) 2월 승정원 우승지(右承旨)에 발탁되었다. 이때 김안로(金安老)가 권세를 부리면서 올곧은 선비들을 배척하자 스스로 외직을 요청하여 남원부사(南原府使)로 나갔다. 임지에 도착하여 직책을 신중히 수행하고 백성을 너그럽게 대하고 관리를 엄하게 다스리니, 온 경내가 부모처럼 추앙하였다. 그때 마침 권세가인 허확(許確)이 전주부윤(全州府尹)으로 와 있었으나, 박우는 그를 찾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허확과 그의 아들 허흡(許洽)·허항(許沆)이 재차 초청하였으므로, 마지못해 한번 공관(公館)으로 찾아갔는데, 인사가 끝난 후 환담(歡談)하지 않고 곧바로 일어나 돌아와 버리니, 허흡·허항 형제가 앙심을 품었다. 1년이 지나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나주(羅州) 시골집으로 돌아갔다. 그 뒤 2년에 특별히 도승지(都承旨)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그 명이 취소되었다. 그때 허항이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으로 있으면서 자신을 추종하는 이들과 함께 그를 교묘하게 비방하다가 이내 탄핵하였다. 그리하여 박우는 1536년(중종 31) 3월에 공주목사(公州牧使)로 좌천되었다가 곧 파직을 당하였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537년(중종 22) 5월에 다시 병조 참지(參知)가 되었는데, 허항 등이 또 탄핵하여 해주목사(海州牧使)로 나갔다. 해주는 관서(關西)의 큰 고을로서 다스리기 어렵다고 소문이 났다. 그는 유학(儒學)을 일으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 고을에 가르칠 만한 선비를 선발하여 문장만 가르치지 않고 예절과 효제(孝悌)의 방도도 가르쳤는데, 그로부터 해서에세 인재가 호남(湖南)과 영남(嶺南)에 못지않게 배출되었다. 그 뒤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가 병조 참의(參議)를 거쳐 이조 참의가 되었다. 1541년(중종 36) 9월에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이 되었는데, 이 해 11월에 파직되었다가 1542년(중종 37) 2월에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가 되었다.
[인종 · 명종 시대의 활동]
1545년(인종 1) 1월에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이 되고, 춘추관 동지사(同知事)를 겸임하여 『중종실록(中宗實錄)』을 감수(監修)하였다. 1546년(명종 1) 4월에 중추부 동지사가 되었다. 그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치사(致士)할 나이가 되었는데 녹봉에 얽매어 있을 바에야 구차하게 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어 외직을 청해 전주부윤(全州府尹)으로 나갔다. 부임한지 7개월 만에 병환이 나서 사직하고 돌아왔다. 1547년(명종 2) 윤9월 28일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성품과 일화]
박우는 어려서부터 식견이 높고 늠름하게 빼어나 번거롭게 가르치지 않아도 날로 진취되고 달로 발전하여 탁월하게 일찍 성취되었다. 가정의 살림이 여유가 없어 집안이 쓸쓸하였으나 문묵(文墨)을 즐기면서 생업(生業)은 일삼지 않았다. 전라도 관찰사가 그가 청백한 절개를 지녔다고 조정에 보고하니, 임금의 특별한 명으로 가의대부(嘉義大夫)가 되었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명종실록(明宗實錄)』에, “박우는 성격이 쾌활하여 비록 혐의를 회피하지 않고 시정배들을 치죄(治罪)했으나 그의 본뜻은 사사로운 것이 없었다. 그 죄가 어찌 파직에까지 이르겠는가. 미미한 일에 시정배의 참소로 인해서 한성부의 당상관이 파직되기까지 하였는데도 임금은 그것이 너무 지나치다는 것을 모르니, 아랫사람들이 윗사람을 업신여기는 풍조가 이로부터 더욱 조장될 것이다.”라고 사신이 그에 관하여 논하였다.
[묘소와 추증]
묘소는 전라도 나주(羅州) 남쪽 마산리(馬山里) 백봉산(白鳳山)에 있으며, 임억령(林億齡)이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사후에 조정에서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하였다. 부인 당악김씨(棠岳金氏)는 성균생원(成均生員) 김효정(金孝禎)의딸인데, 자녀는 2남 2녀를 두었다. 1남 박개(朴漑)는 한성부 참군(參軍)이고, 2남 박순(朴淳)은 사헌부 집의(執義)이다. 1녀는 허강(許剛)의 처가 되었고, 2녀는 염주(廉宙)의 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