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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88년(선조 21)~1644년(인조 22) = 57세]. 조선 중기 광해군(光海君) · 인조(仁祖) 때에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승지(承旨)이다. 자는 유언(裕彦)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주거지는 선산(善山)이다. 아버지는 증 이조 참판 박정실(朴鼎實)이고, 어머니 성주이씨(星主李氏)는 현령(縣令)이민선(李敏善)의 딸이다.
[광해군 · 인조 시대의 활동]
1617년(광해군 9) 향시(鄕試)에 합격하고, 1618년(광해군 10) 증광시(增廣試)문과(文科) 을과(乙科)에 합격하여 1619년(광해군 11) 3월 승문원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에 보임되었는데, 어버이를 위하여 외직을 자청해서 성현 찰방(省峴察訪)이 되었다. 1623년(인조 1) 어머니 상(喪)을 당하였다. 상기를 마치고 전적(典籍)이 되었다가, 다시 예조 좌랑(佐郞)이 되었고, 이듬해 예조 정랑이 되어 사관(史館)의 기주관(記注官)을 겸임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몽진(蒙塵)한 인조를 호종(扈從)하였다. 난 후에 자진하여 금구현령(金溝縣令)으로 나가서 민심을 수습하고 전쟁 복구에 힘썼다. 이때 허물어진 학궁(學宮)을 좋은 곳으로 옮겨서 새로 짓고, 고을 자제들 중에 준수한 자들을 선발하여 체계적으로 가르쳤다. 그가 부임한 지 4년 만에 아들의 상(喪)을 당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가자, 백성들이 추모하여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 이듬해 다시 예조로 들어갔는데, 그가 복잡한 업무를 잘 다스린다고 하여, 평양부 서윤(庶尹)에 발탁되었다. 평양은 서쪽 관문의 대로(大路)에 위치해 있어서 전령과 사신의 왕래가 빈번하여 응접하기에 겨를이 없었고, 간교한 관리와 송사를 맡은 관원이 법을 교묘하게 꾸며 서로 속이고 엄폐하였으므로 가장 다스리기 어렵다고 소문이 났다. 그가 마음을 가다듬어 분석하고 판단을 내려 쌓인 송사를 씻은 듯이 처리하여, 억울하게 적체된 일이 없어지자, 민심이 만족스러워 하였다. 그러나 그를 좋아하지 않던 봉사(奉事)의 모함을 받아 의금부(義禁府)로 붙잡혀 가기도 하였는데, 사실이 밝혀지면서 곧바로 풀려났다. 그 후 오래되지 않아 다시 예조로 들어갔다가, 이윽고 통례원(通禮院)상례(相禮)가 되고, 1634년(인조 12) 8월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으며, 그해 11월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가, 1635년(인조 13) 10월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었다.
그때 마침 변방에 오랑캐가 침입할 우려가 있었으므로, 특별히 온성부사(穩城府使)에 임명되어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되었다. 그는 임지(任地)에 부임하여 군정(軍政)을 쇄신하는 한편, 백성들이 상환하지 못한 묵은 곡물을 탕감하고 궁핍한 백성들을 보살피니, 군사와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그 후 병조로 들어와서 병조 참지(參知)가 되었다. 그리고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었고,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승진되었다. 이듬해 형조 참의(參議)가 되었다가, 경주부윤(慶州府尹)이 되었는데, 그 품계는 종2품의 대신 반열(班列)이었다. 그는 부임한지 3년 만에 몸이 야위기 시작하였으므로, 판결사(判決事)와 좌승지(左承旨)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못하였고, 결국 1644년(인조 22) 3월 10일 상주(尙州)의 객사(客舍)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57세였다.
[성품과 일화]
그는 몸집이 풍만하고 장대하며 국량이 컸는데, 특히 정사를 보는 데 뛰어났다. 그는 6세에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스스로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고 어머니를 봉양하는 날이 짧았다고 하여, 평생 고량진미(膏粱珍味)를 먹지 않고 악의 악식(惡衣惡食)하였다. 벼슬살이 할 때에는, 명예에 급급하지 않았으며, 물산이 풍부한 고을에 부임하더라도 선비 때의 지조를 지켰다.
그는 어려서 어머니를 따라 비안현(比安縣) 관사(館舍)에 사는 외가에 가서 살았다. 이때 마침 중국에서 왜적(倭賊)을 정벌하러 나온 명(明)나라 군사들이 비안현의 주변에 이르렀는데, 현감이 자리에 없는 것을 보고, 이들 군사들이 난폭하게 약탈을 자행하였다. 고을 사람들은 이들을 두려워하여 몸을 숨기었으나, 당시 나이가 겨우 열 살이었던 그는 두려워하지 않고 명나라 군사를 찾아가서, 현감이 지금 없다고 알렸다. 그러자, 명나라 장수가 어린 아이의 당당하고 기민한 것을 보고 매우 기특하게 여겨 칭찬하기를, “후일 귀인(貴人)이 될 것이다.” 하고, 곧 바로 명령을 내려서 부하들의 약탈을 금지하였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그가 광해군 때 과거를 보러 가는 길에 곽재우(郭再祐)를 만났던 일화를 전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곽재우는 그에게 “이런 때 과거(科擧)를 보아서 무엇 하려는가?” 말하고 술을 가져다가 4~5잔 마신 다음, 다시 말하기를 “술을 마셨더니 괴로워서 기분이 아주 불편하다.”하고 그릇을 가져오게 하여 귀를 기울여 술을 쏟아내니, 술이 귓구멍으로부터 모두 나와 버렸다고 한다. 이 일화는 사실을 그대로 믿을 수 없으나, 여기서 그가 현풍(玄風)·의령(宜寧)에 살았던 곽재우와 교제가 깊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곽재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義兵將)으로 용맹을 떨쳤는데, 광해군 때는 그 위세가 높아져서 아무나 그를 만날 수 없었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경상도 선산 금오산(金烏山) 북쪽 다복동(多福洞)에 있는데, 부인 연일정씨(延日鄭氏)와 같은 자리에 있으나 봉분이 따로 있다. 청음(淸陰) 김상현(金尙憲)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자녀는 2남 2녀를 두었는데, 1남은 박진환(朴震煥)이고, 맏딸은 정원심(鄭元諶)의 처가 되었고, 둘째 딸은 조상변(趙相抃)의 처가 되었다. 서출 아들은 박진욱(朴震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