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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 태종~세종 때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성균관(成均館)대사성(大司成)이다. 자는 영가(寧可)이고, 호는 표정(票亭)이다. 본관은 비안(比安)인데, 아버지는 중랑장(中郞將)박점(朴漸)이다. 길재(吉再)의 문인이다.
[태종~세종 시대 활동]
음보(蔭補)로 성균 학정(成均學正)이 되었고, 1401년(태종 1) 증광시(增廣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407년(태종 7) 4월 문과(文科)중시(重試)에 을과(乙科)로 급제, 우정언(右正言)에 제수되고, 전(田) 20결(結)과 노비 1구(口)를 하사받았다. 1408년(태종 8) 병조 좌랑(佐郞)이 되었으나, 그 해 11월 26일 건원릉(健元陵)에서 배봉(陪奉) 환궁(還宮)하는 반차(班次)에서 앞뒤를 돌보지 아니하고 반차를 무시하여 말을 탔다는 등으로 인하여 사간원(司諫院)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411년(태종 11) 우헌납(右憲納)이 되었고, 1414년(태종 14) 응교(應敎)가 되었으며, 그 뒤 전서(典書), 필선(弼善)이 되었다.
1419년(세종 1) 12월 사간부(司諫府) 집의(執義)가 되었다. 1420년(세종 2) 4월 장령(掌令)정연(鄭淵)과 함께 철원에 가려는 상왕(上王) 태종에게 간하다가 의금부에 하옥되었다가 상주로 귀양갔는데, 상왕이 용서하여 그 해 6월 서울 밖에서 종편(從便)하여 살도록 하였다. 1426년(세종 8)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1428년(세종 10) 1월 종묘(宗廟) 제향(祭享)의 대축판사(大祝判事)로 친향(親享) 때 축문을 여덟 자나 빠뜨리고 읽어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 해 11월 대사성으로 통신사(通信使)가 되어 12월에 일본에 갔다가 다음해인 1429년(세종 11) 12월에 돌아왔다. 같은 해 2월 우군첨총제(右軍僉摠制)가 되었다. 1430년(세종 12) 1월 집현전(集賢殿)부제학(副提學)이 되었고, 9월 공조 참의(參議)가 되었다. 그는 공조 참의로 있을 때인 1431년(세종 13) 6월 앞서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올 당시 배워온 수차(水車)의 이점을 건의하여 농사의 관개(灌漑)에 혁신을 가져왔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병조 참의가 되고, 1432년(세종 14) 3월 병조 좌참의(左參議)가 되었으며, 그 해 7월 안동대도호부판사(安東大都護府判事)가 되었다. 편서로는 『야은언행록(冶隱言行錄)』이 있다.
[상훈과 제향]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고, 비안(比安)의 구천서원(龜川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부인 정씨(鄭氏)는 정득화(鄭得和)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