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총론]
[1686년(숙종 12)~1739년(영조 15) = 54세]. 조선 후기 숙종~영조 때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의정부(議政府) 우참찬(右參贊)이고, 증직(贈職)은 좌찬성(左贊成)이다. 자는 노경(魯景)이고, 호는 내헌(耐軒)·내재(耐齋)이며,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조부는 금창부위(錦昌副尉) 경헌공(敬憲公) 박태정(朴泰定)이며, 조모는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둘째딸 경녕군주(慶寧郡主)이다. 양아버지는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박필명(朴弼明)이고, 친아버지는 사헌부 감찰(監察) 박필영(朴弼英)이다. 양어머니 한산이씨(韓山李氏)는 이흥직(李興稷)의 딸이고, 친어머니 죽산안씨(竹山安氏)는 예조 참판(參判)안진(安縝)의 딸이다. 첫째 부인 여산송씨(礪山宋氏)는 송정명(宋正明)의 딸이고, 둘째 부인 인동장씨(仁同張氏)는 장태형(張泰亨)의 딸이다.
[경종~영조 시대 활동]
1714년(숙종 40) 사마시(司馬試)에 생원(生員)으로 합격하여 참봉(參奉)이 되었다. 1723년(경종 3) 3월 증광시(增廣試)문과(文科)에 장원급제하여 전적(典籍)이 되었고, 그 뒤 안동부사(安東府使)가 되었다. 그가 안동부사로 있을 때인 1725년(영조 1) 1월 청렴하고 검소하여 맡은 고을을 잘 다스려 특이한 공적 쌓았다고 상을 받았다. 1727년(영조 3) 12월 승지(承旨)가 되고, 1728년(영조 4) 대사성(大司成)·영남안무사(嶺南按撫使)·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대사간(大司諫)·대사헌·판결사(判決事) 등을 역임하였는데, 이때 영조에게 『감란록(勘亂錄)』을 찬수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는 임금의 뜻에 따라 송인명(宋寅明) 등과 함께 탕평책(蕩平策)을 주도하여 갔다. 뒤에 그는 당인이라고 하여 『감란록』 찬수의 일을 사직하고, 대신 조현명(趙顯命)의 중용을 청하였다. 이어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가 되었다가 1729년(영조 5) 병조 참판(參判)·강화유수(江華留守)가 되었다.
1732년(영조 8) 춘추관(春秋館)동지사(同知事)·대사헌·형조 참판·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가 되었다. 1734년(영조 10)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가 되었다가 다시 대사헌이 되었고, 1737년(영조 13) 호조 판서(判書)가 되었으며, 1738년(영조 14) 예문관(藝文館)제학(提學)·공조 판서(判書)·홍문관(弘文館)제학(提學)이 되었다. 1739년(영조 15) 6월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되고, 9월에 우참찬(右參贊)이 되었는데, 이 달 21일 세상을 떠나니 나이는 54세이다. 그는 그림에도 뛰어난 재주를 보였으며, 특히 죽화(竹畫)에 능하였다.
[성품과 일화]
박사수는 청렴하고 검소하였다고 한다. 『영조실록(英祖實錄)』 영조 15년 9월 21일(을축)조의 「박사수 졸기(卒記)」에는 그가 송인명 등과 함께 탕평론(蕩平論)을 주장하고 연차(聯箚)한 대신(大臣)을 역안(逆案)에 두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등, 나라를 위하는 혈성(血誠)이 그 누구보다도 대단하여, 영조도 일찍이 이 점을 칭찬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졸기에는, “그 사람됨이 조급하여 뜻에 맞지 않는 것이 있으면 잠시도 참지 못하였는데, 지위가 정경(正卿)의 반열에 이르러서도 거조(擧措)에 경급(輕急)한 것이 많아서 신중하지 못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이 때문에 부족하게 여겼다”는 그에 관한 평도 있다.
[시호와 추증]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1755년(영조 31) 12월 좌찬성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