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총론]
[1561년(명종 16)~1608년(광해군 즉위) = 미상]. 조선 중기 선조~광해군 때 활동한 무신. 행직(行職)은 전라도 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이다. 본관은 죽산(竹山)이다. 이름이 박명현(朴名賢)인데, 박명현(朴命賢)·박명현(朴明賢)으로 쓰기도 한다.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박원형(朴元亨)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천문습독관(天文習讀官) 박근(朴近)이고, 형은 박영현(朴英賢)과 박제현(朴濟賢)이다. 아들은 박흥인(朴興仁)인데, 아명이 박몽동(朴蒙同)이다.
[선조·광해군 시대 활동]
1589년(선조 22) 증광시(增廣試)무과(武科) 을과(乙科)에 합격하여 무장(武將)이 되었다. 1592년(선조 25) 8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별장(別將)으로서 방어사(防禦使) 김응서(金應瑞) 등과 용강(龍岡)·삼화(三和)·증산(甑山)·강서(江西) 등 바닷가 여러 고을의 군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20여 둔(屯)에 배치하고 평양의 서쪽을 압박하며 때로 열세한 적을 소탕하면서 성 밖까지 이르렀다. 그 뒤 평양에서 적과 싸워 경성(京城)까지 추격하였다. 토포사(討捕使)·우후(虞侯)·호군(護軍)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후인 1596년(선조 29) 7월 이몽학(李夢鶴)이 충청도 홍산(鴻山)에서 반란을 일으켜 여러 고을을 함락하고 홍성(洪城)으로 진격하자, 그 근처에서 군사 활동을 벌이다가 병력을 거느리고 홍주성(洪州城)으로 들어가 목사(牧使)홍가신(洪可臣)과 협력하고, 성 밖의 군사들과 연락하여 내외 협공의 태세를 취하였다. 이몽학이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자 무장 임득의(林得義)와 함께 청양까지 추격하여 반란을 평정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충청도 방어사(忠淸道防禦使)·전라도 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 등을 지내면서 호서·호남 일대에서 전공을 세웠다. 1604년(선조 37) 6월 <이몽학의 반란>을 평정한 공으로 청난공신(淸難功臣) 2등(二等)에 녹훈되고, 연창군(延昌君)에 봉하여졌으며, 위계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르렀다.
1608년(광해군 즉위) 무장 고언백(高彦伯)과 함께 임해군(臨海君)을 추대하려 하였다는 죄목으로 잡혀 문초를 받던 중 물고(物故)되었고, 그 해 11월 공신녹권(功臣錄券)에서도 삭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