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자료문의 : 한국학중앙연구원 031-730-8765
1477년(성종 8) 무렵에 박경은 사경(寫經)하는 일로 봉선사(奉先寺)에 다녀오다가 “영응대군(永膺大君)의 부인 송씨(宋氏)가 중 학조(學祖)와 사통(私通)을 했다.”라는 방(榜)이 동대문(東大門)에 붙은 것을 보고 김일손(金馹孫)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박경이 김일손에게 이야기한 이 사실이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김일손의 자백에서 나오는 바람에 그는 형신을 받고 7월 28일에야 석방되었다.
1507년(중종 2)에 행 호군(行護軍) 심정(沈貞)·남곤(南衮) 등이 서얼(庶孽) 박경(朴耕) 일당이 좌상(左相) 박원종(朴元宗)·유자광(柳子光)·노공필(盧公弼) 등 임금의 측근을 제거하고, 정미수(鄭眉壽)를 영의정에, 김감(金勘)을 병조 판서에 추대하려는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밀고하면서 옥사가 일어났다. 그 해 윤1월에 추관들이 함께 의계하기를, “박경·김공저 등은, 대신(大臣)을 모해하여 조정을 어지럽혔으니 참형(斬刑)을 하여야 하겠습니다.”라고 하여, 이에 박경과 김공저는 참형에 처하여졌다.
박경은 학문이 있고, 또 일을 많이 알 뿐만 아니라, 당대의 명필가로서 글씨의 서법(書法)도 교묘하여 시책의 제목은 거의 도맡아 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