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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369년(고려 공민왕 18)~1422년(조선 세종 4) = 54세]. 고려 말 공양왕~조선 초기 세종 때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안변도호부사(安邊都護府使)이고, 증직(贈職)은 찬성(贊成) 이다. 자는 유지(柔之)이고, 호는 나산(蘿山), 경수(耕叟)이며,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아버지는 태조(太祖)의 원종공신(原從功臣)인 호조 전서(典書) 박침(朴忱)이며, 어머니는 박씨는 박린(朴隣)의 딸이다.
[고려 말 공양왕~조선 세종 시대 활동]
1390년(공양왕 2) 고려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예문검열(藝文檢閱)이 되었다.
1392년(태조 1) 조선이 개국 되자 호조 전서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1405년(태종 5)에는 병조 정랑(正郞)이 되었으며, 1408년(태종 8) 2월 진위사(陳慰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 경사(京師)에 갔는데, 세자(世子)에 대한 보고를 잘하여 명나라 황제의 인정을 받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돌아오게 되었다. 그 공로로 태종으로부터 쌀·콩 20석(石)을 하사 받고, 의정부 사인(舍人)으로 승진되었다. 1409년(태종 9) 선공감(繕工監)을 맡았다. 인주지사(仁州知事)로 재직할 때의 사소한 부정 사건에 연루되었는데, 1412년(태종 12)에 태형(笞刑)을 받고 사임하였다. 1417년(태종 17) 윤5월 수원부사(水原府使)로 재임 중 서울로 교체되어 가는 과천현감(果川縣監) 윤돈(尹惇)의 전별연(餞別宴)을 안양사(安養寺)에서 하다가 금천현감(衿川縣監) 김문(金汶)이 과음하여 갑자기 죽는 일이 발생하였는데, 이 일이 발각되자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그 뒤 다시 등용되어 세종 때 안변도호부사(安邊都護府使)를 지냈다. 1422년(세종 4)에 세상을 떠나니 54세였다.
[성품과 일화]
『태종실록(太宗實錄)』 태종 18년 2월 29일조에는 박강생에 관하여 “조사(朝士)와 결탁하기를 좋아하고 권귀(權貴)에 아부하여 출세하였는데, 탐욕하고 방종하고 불법(不法)하여 드디어 더럽고 욕된 이름을 얻게 되었다.”라는 평을 하였다.
[묘소와 추증]
묘소는 현재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주교동 553-1번지 두응촌 조부 상장군 박사경 묘 아래 계좌에 있다. 1424년(세종 6) 10월 딸이 세종의 후궁(後宮)이 되고, 11월에 장의궁주(莊懿宮主)로 봉해지자, 그도 찬성(贊成)에 추증(追贈)되었다. 부인은 파평윤씨(坡平尹氏) 윤홍경(尹汞慶)의 딸인데, 3남 5녀의 자녀를 두었다. 1자는 박의문(朴疑問)이고, 2자는 박절문(朴切問)이며, 3자는 박심문(朴審問)이다. 1녀는 김숙양(金叔亮)의 처가 되었고, 2녀는 함우공(咸禹功)의 처가 되었으며, 3녀는 유종(柳淙)의 처가 되었고, 4녀는 서효온(徐孝溫)의 처가 되었으며, 5녀는 세종의 후궁인 장의궁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