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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54년(명종9)∼1627년(인조5)= 74세]. 조선 중기 선조~인조 때의 문신. 자는 이직(而直), 호는 몽죽(夢竹)이다. 본관은 창원(昌原)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대호군(大護軍) 황대임(黃大任)이고, 어머니 순흥안씨(順興安氏)는 안세형(安世亨)의 딸이다. 아버지가 양자로 갔으므로, 양조부는 한성부판윤 황침(黃琛)이고, 생조부는 경기도관찰사 황기(黃琦)이다. 명장 장무공(莊武公) 황형(黃衡)의 증손이고, 명종과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원자인 순회세자(順懷世子)의 처남이며, ‘삼학사(三學士)’ 가운데 한 사람인 윤집(尹集)의 외조부이다.
[선조시대 활동]
1579년(선조12) 사마시에 생원으로 합격하고, 1580년(선조13) 27세에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성균관 권지 학유에 보임되었다가 성균관 학정과 박사, 사헌부 감찰을 역임하였다. 이어 호조 · 병조 · 형조의 낭관(郎官)을 두루 맡았고, 성균관 직강, 선공감 정 · 군자감 정을 차례로 맡았다. 1591년(선조24)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 명(明)나라에 가서 일본 막부(幕府)의 동향을 상세히 보고 하였다. 귀국하자, 선조는 그가 명나라 조정에서 칭찬 받은 것을 포상하여 자급(資級)을 올려 주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경기도순찰사 호조 판서 권징(權徵)의 종사관으로 임명되어, 권협(權悏) · 신암(申黯) 등과 함께 강화의 교동(喬洞)에서 군량미를 조달하였다.(『서애집(西厓集)』 권9) 1593년(선조26) 해운판관(海運判官)에 임명되어 군량미를 운송하였고, 1594년(선조27) 파주목사(坡州牧使)가 되어 민심을 안정시켰다. 1597년(선조30)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는 명나라 사신을 영접하는 접반관(接伴官)이 되었다. 1599년(선조32) 철산군수(鐵山郡守)에 임명되었고, 1604년(선조37) 부평부사(富平府使)가 되었는데, 경기도관찰사 김수(金睟)가 그가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그의 유임을 바란다고 보고하여, 포장(褒奬)을 받고 유임되었다. 1605년(선조38) 4월 남원부사(南原府使)를 거쳐, 1607년(선조40) 안주목사(安州牧使)에 임명되었다. 그 밖에 여러 고을의 수령관으로 부임하였는데, 그는 정성을 다하여 다스리니, 교활한 이속(吏屬)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감히 속이거나 숨기지 못하였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08년(광해군즉위) 56세에 중시(重試)에 급제하여,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되었다. 1609년(광해군1) 호조 참의와 공조 참의를 역임하고, 풍덕군수(豊德郡守)로 나갔다. 1610년(광해군2) 호패청(號牌廳)에서 8도에 안무사(按撫使)를 파견할 때, 황해도에 파견되어 호패를 점검하고 민정을 살폈다. 당시 대북파 권신 이이첨(李爾瞻)은 항상 반대파의 사류(士類)들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역옥(逆獄)을 날조하였다. 1610년(광해군2) 성주(星州)의 도적떼 김덕룡(金德龍) · 김언춘(金彦春) · 윤삼빙(尹三聘) 등이 체포되어 포도청에 끌려와서 심문을 받았는데,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포도청 도직(盜直) 한희길(韓希吉)이 그들을 회유하고 협박하여, 황치경 일파와 역모를 꾸몄다는 거짓 증언을 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황치경 · 임득여(林得輿) · 임정로(林廷輅) 등 수십 명의 사류들이 체포되어, 광해군의 친국(親鞫)을 받았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21) 이때 황치경은 상신(相臣) 심희수(沈希壽)와 함께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여 접대하다가, 체포되어 옥리(獄吏)에게 끌려갔는데, 상신 심희수가 친국하는 곳으로 달려가서 광해군에게 극력 변호하였다. 또 대질 심문에서 모함한 사실이 밝혀져서 사면되었다.(『응천일록(凝川日錄)』 권1) 이때부터 광해군 시대 12년 동안 황치경은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서 은거하였다.
[인조시대 활동]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직후, 조정에서는 정치를 일신(一新)하기 위해 재능있는 사람을 관찰사로 보냈다. 황치경은 전라도관찰사에 부임하여 호남의 민심을 안정시켰다. 1624년(인조2) 춘천부사(春川府使)로 있을 때 <이괄(李适)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이괄의 군사가 서울에 들어와서 선조의 제9자 흥안군(興安君)을 추대한다는 말을 듣자, 그는 공석에서 선조의 제6자 인성군(仁城君)을 추대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그러나 반란이 평정된 다음에 이것이 문제가 되어서 멸문(滅門)의 화를 당할 뻔하였다. 그를 체포하여 심문하던 의금부에서는, 난이 일어나자 황치경이 가장 먼저 군사를 이끌고 온 것, 그의 아들 현감 황수(黃瀡)가 이괄의 가족들을 생포한 것 등 부자의 활약을 보고하며 적극 변호하였다. 이에 인조도 그를 용서하여 황해도 연안(延安)에 유배하였다가 그해 겨울에 석방하였다.(『응천일록』 권3) 1627년(인조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인조는 황치경을 경기도호소사(京畿道號召使)로 기용하여 의병(義兵)을 모으고, 군량미도 조달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해 11월 20일에 서울의 도성(都城) 서쪽에 있는 본가에서 노병으로 돌아가니, 향년이 74세였다.
[성품과 일화]
황치경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타고난 자질이 매우 훌륭하여 명성이 일찍부터 높았다. 글을 잘 지었고, 활쏘기와 말타기도 잘하였으며 지략도 남보다 뛰어났다. 또 그는 일의 성패(成敗)를 매우 정확하게 예측하였다. 사람들은 그가 증조부인 명장 황형의 혈통을 이어받았다고 하며, 문무를 겸전한 인물로 인정하였다. 부모를 효성으로 섬기면서 공경과 봉양을 빠짐없이 모두 갖추었다. 황대임은 딸이 순회세자빈(順懷世子嬪)이 되자, 사위 순회세자를 외척들의 권력 다툼 속에서 보호하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무함을 받아 10여 년 이상 동쪽과 북쪽의 변방에 귀양 가서 고생하였다. 황대임이 유배지에서 돌림병이 걸린 적이 있었는데, 황치경은 서울에 있다가 유배지까지 한걸음에 달려가 아버지를 간호를 하였다. 아버지의 병이 낫고 그도 전염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아들의 효성에 하늘이 감동한 결과라고 말하였다. 70세가 넘어 머리가 하얗게 센 황치경이 마치 어린아이처럼 색동옷을 입고 90세의 아버지를 즐겁게 해드렸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를 “참 효자”라고 감탄하였다. 아버지 황대임이 강화도에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서울에 와서 살고 싶어 하니, 그가 즉시 옛집을 새로 짓고 몇 달 안 되어 아버지를 서울로 모시기도 하였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의 홍복산(洪福山)의 선영에 있는데, 해창군(海昌君) 윤방(尹昉)이 지은 비명이 남아 있다. 부인 창녕성씨(昌寧成氏)는 성균관 사예 성자의(成子漪)의 딸인데, 부부가 58년간 해로(偕老)하였고, 자녀는 1남 4녀를 낳았다. 외아들 황수는 문과에 급제하여 목사를 지냈다. 장녀는 사간원 정언 목취선(睦取善)의 처, 차녀는 성균관 박사 정근(鄭謹)의 처, 막내딸은 중추부 첨지사 윤형갑(尹衡甲)의 처가 되었다. 손자 황호(黃㦿)는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직강을 지냈다. 외손자 정유성(鄭維城)은 문과에 급제하여 필선을 지냈고, 윤계(尹棨)는 문과에 급제하여 응교를 지냈다. 윤집은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정랑을 지냈는데,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순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