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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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黃進)

서지사항
항목명황진(黃進)
용어구분인명사전
분야정치·행정가
유형인물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총론]
[1550년(명종5)∼1593년(선조26) = 44세]. 조선 중기 선조 때의 무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한 무장(武將). 자는 명보(明甫). 호는 아술당(蛾述堂)이다. 본관은 장수(長水)이고, 주거지는 전라도 남원(南原)이다. 아버지는 생원 황윤공(黃允恭)이고, 어머니 남양방씨(南陽房氏)는 봉사 방응성(房應星)의 딸이다. 정국공신(靖國功臣) 황탄(黃坦)의 손자이며, 명재상 황희(黃喜)의 5대손이다.

[선조시대 활동]
1576년(선조9) 27세에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으나 모친상을 당하여 3년간 고향에서 여묘살이를 하였다. 상례를 마치고 거산도찰방(居山道察訪)이 되어 1583년(선조16) 함경도 시전(時錢)의 전투에 참전하였다. 이때 참획한 오랑캐의 수급(首級)을, 죄를 지어 충군(充軍)된 친구에게 양보하였다. 그 뒤에 경원부(慶源府) 안원보(安原堡) 권관(權管)을 거쳐, 다시 선전관에 임명되었다. 1591년(선조24) 통신사(通信使)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과 부사(副使) 김성일(金誠一) 일행을 수행하여 일본에 갔다가 그 형세를 보고 일본군이 곧 조선으로 침략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리하여 자기 노자를 털어 일본 보검(寶劍) 한 자루를 사가지고 돌아오면서, “왜적이 쳐들어올 때 내가 장차 이 검을 쓸 것이다.”고 하였다. 이어 제용감 주부를 거쳐, 동복현감(同福縣監)이 되었는데, 장차 왜변이 일어날 것을 짐작하고, 이에 대비하여 매일 공무가 끝나면 언제나 갑옷을 입고 말을 달리면서, 실전에 필요한 온갖 무예를 연마하였다.(『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임진왜란 초기 활동]
1592년(선조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근왕(勤王)하기 위해 고을의 군사를 이끌고 전라도관찰사 이광(李光)을 따라 용인(龍仁)까지 북상하였다. 이 때 일본군의 습격으로 전라도 군사가 거의 전멸하였으나 그는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수원(水原)에 잠복하였으므로 온전히 동복현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17) 그 뒤에 여러 장수들과 함께 웅치(熊峙)를 지키던 중, 일본의 주력 부대가 전주(全州)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병력을 이끌고 전주로 달려갔다. 도중에 진안(鎭安)에 침입한 일본의 선봉 부대를 전멸시켰고 안덕원(安德院)에서 일본의 주력 부대와 만나 접전을 벌인 끝에 크게 격파하였고 그 전공으로 그는 훈련원 판관에 임명되었다. 이현(梨峴)을 지키고 있을 때, 한 밤중에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다리에 탄환을 맞았으나, 휘하의 군사들이 힘껏 싸운 끝에 왜적을 물리쳤다.(『간이집(簡易集)』 권1)

부상을 치료하는 사이에, 훈련원 부정으로 승진하였다. 이어 전라도체찰사 정철(鄭澈)이 그의 명성을 듣고 익산군수(益山郡守)에 임명하고 전라도조방장을 겸임하게 하였다. 이어 전라도절도사 선거이(宣居怡)를 따라 북상하여 수원에 주둔하면서, 크고 작은 전공을 세웠다. 그동안 세운 전공으로 정3품상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승품되고 충청도조방장에 임명되었다. 이어 1593년(선조26) 충청도병마절도사로 승진하여 충청도병마사의 행영(行營)을 안성(安城)으로 옮기고 군사를 재정비하였다. 적장 후쿠시마[福島正則]가 안산(安山)을 탈취하려고 죽산성(竹山城)에서 나오자, 그는 이들과 맞서 싸워 죽산성을 빼앗았다. 또 퇴각하는 일본군의 뒤를 추격하여, 상주(尙州)의 적암(赤巖) 등에서 싸워 연달아 승리를 거두었다. <임진왜란> 때 가장 용맹을 떨친 명장으로 바다에서는 이순신(李舜臣), 육지에서는 황진을 꼽을 수 있다.

[제2차 진주성 싸움과 황진의 죽음]
1593년(선조26) 명(明)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의가 거의 성립되어, 일본군의 주력 부대는 남쪽으로 철수하였고 명나라 군사도 일단 전투를 중단하였다. 그러자, 일본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제1차 진주성 전투>의 패배를 복수하려고 주력 부대를 진주성으로 총집결시켰는데, 그 군사 규모가 5, 6만여 명이나 되었다. 이에 대항하여 김해부사(金海府使) 이종인(李宗仁)이 제일 먼저 군사를 이끌고 진주성으로 들어갔고, 그 뒤를 이어서 경상도우병마사 최경회(崔慶會), 사천현감(泗川縣監) 장윤(張潤) 등이 관군을 이끌고 들어왔다. 충청도병마사 황진은, 고립된 성이라 구할 수 없다는 의병장 곽재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김천일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며 그해 6월 충청도 병사를 이끌고 진주성으로 들어갔다.(『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권3) 이어 김천일(金千鎰) · 고종후(高從厚) · 양산숙(梁山璹) 등 전라도 의병장들과 김준민(金俊民) 등 경상도 의병장들도 의병들을 이끌고 자발적으로 모여 들었다.

문관 출신인 진주목사 서예원(徐禮元)을 대신하여 나주 의병장 김천일이 총지휘를 하고, 황진은 ‘순성대장(巡省大將)’을 맡아서 김해부사 이종인과 함께 전투 계획을 세웠다. 6월 20일 일본군의 대병력이 진주성으로 진격하면서 <제2차 진주선 전투>가 벌어졌다. 며칠 동안 공성(攻城)하는 왜군과 이에 대항해 수성(守城)하는 조선군 사이에서 일진일퇴의 전투가 거듭되었다. 전투 중 큰 비가 내려 성벽이 무너지자 황진은 직접 돌과 흙을 져 날랐고 밤을 새워 성벽을 다시 쌓았다. 이에 감명받은 백성들이 모두 나서서 도왔으므로, 하루 만에 성벽을 보수할 수 있었다. 6월 28일 새벽녘에 왜적이 진주성의 동쪽과 북쪽을 침범하여 크게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종인이 한바탕 크게 싸워 왜적을 물리쳤다. 순성대장 황진이 순찰하다가 이곳에 이르러서 이종인의 무예를 칭찬하였다. 그리고 성 밖 상황을 살펴보다가, 성 아래 잠복해 있던 적병의 총을 이마에 맞고 즉사하였는데, 향년이 겨우 44세였다.(『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진주성 전투는 6월 20일부터 6월 29일까지 전개되어 서로 치열하게 공방을 벌였는데, 8일째 되던 날 황진 · 장윤 · 김준민이 왜적의 탄환에 전사하자 그들에게 의지하던 장병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성안의 민심도 흉흉해지기 시작하였다. 그 다음날 서북쪽 성벽으로 일본군이 난입하여, 진주성 안의 사람들을 모조리 학살하여, 약 6만여 명이 한꺼번에 죽었다. 진주목사 서예원 등은 도망쳤고, 최경회 · 이종인 · 고종후 등 수십 명의 지휘자들과 나머지 사람들은 남강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성품과 일화-전쟁터에서 꽃피운 우정]
황진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체격이 장대하고, 수염이 아름다워, 그 모습이 매우 특이하고 훌륭하였다. 사람됨이 엄격하고 진중하며 기개와 절개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하였고, 어깨의 힘[膂力]도 남보다 세었다. 젊어서 강건하며 민첩하기가 마치 비호(飛虎)와 같아서, 각종 무술 시합에서 항상 이종인과 1, 2등을 다투며 나란히 이름을 날렸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서로 친한 벗이 되어서 생사(生死)를 같이 하기로 약속했다. 두 사람은 무과에 급제하여 이종인은 김해부사로, 황진은 충청도병마사로 진주성 싸움에 자원하여 참가하였다. 그러나 8일째 전투가 끝나고 순찰을 하던 황진은 총탄을 맞고 쓰러져 친구 이종인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17) 황진이 죽었을 때에는 아직 진주성이 함락되기 전이어서, 이종인은 그의 시신을 성 안의 한 구석에 묻었다. 왜적이 물러간 다음에 그의 두 아들이 그 시신을 찾아서 전라도 남원의 선영에 안장하였다. 34년 뒤에 그의 부인 소씨(蘇氏)가 돌아가자, 1626년(인조4) 선영의 옆 자리를 골라서 묘소를 만들고 부부를 합장하였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무민(武愍)이다. 묘소는 전라도 남원 풍산(楓山)의 선영에 있는데, 장유(張維)가 지은 비명이 남아 있다.(『계곡집(谿谷集)』) 죽은 뒤에 좌찬성에 증직되고 정려(旌閭)되었는데, 진주의 창렬사(彰烈祠), 남원의 민충사(愍忠祠) · 정충사(貞忠祠)에 제향되었다.(『청음집(淸陰集)』 권29) 부인 진주소씨(晉州蘇氏)는 부장(部將) 소충세(蘇忠世)의 딸인데, 정경부인(貞敬夫人)에 봉해졌다. 자녀는 2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황정직(黃廷稷)은 무과에 급제하여 안동판관(安東判官)을 지냈고, 차남 황정열(黃廷說)도 무과에 급제하여 교동현감(喬桐縣監)을 지냈다. 손자 황위(黃暐)는 황정열의 아들로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을 지냈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 『난중잡록(亂中雜錄)』
■ 『징비록(懲毖錄)』
■ 『간이집(簡易集)』
■ 『계곡집(谿谷集)』
■ 『면암집(勉菴集)』
■ 『백사집(白沙集)』
■ 『백호전서(白湖全書)』
■ 『상촌집(象村集)』
■ 『서애집(西厓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약천집(藥泉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연암집(燕巖集)』
■ 『잠곡유고(潛谷遺稿)』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청음집(淸陰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택당집(澤堂集)』
■ 『포저집(浦渚集)』
■ 『학봉전집(鶴峯全集)』

■ [집필자] 이현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