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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18년(중종13)∼1598년(선조31) = 81세]. 조선 중기 명종~선조 때의 문신. 자는 중문(仲文), 호는 송간(松澗)이다. 본관은 창원(昌原)이고, 주거지는 경상도 풍기(豊基)이다. 아버지는 의정부 우찬성 황사우(黃士祐)이고, 어머니 연일오씨(延日吳氏)는 오수정(吳壽楨)의 딸이다.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의 장인이다. 주세붕(周世鵬)과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선조시대 활동]
1543년(중종38) 26세로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이후 성균관에 입학하여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564년(명종19) 성균관에서 그의 재주를 아깝게 여겨 여러 차례 음직(蔭職)에 천거하였다. 처음에 전함사 별제에 임명되었다가 금오랑(金吾郞)이 외도 장흥고 직장으로 옮겼다. 1569년(선조2) 52세에 알성시(謁聖試)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많은 나이 때문에 전생서 주부에 임명되었다가, 예조 · 호조 · 형조 · 공조의 좌랑과 정랑을 고루 역임하였으며 성균관 직강과 사성, 사섬시 정 · 예빈시 정 · 종부시 정을 차례로 맡았다. 청도군수(淸道郡守)로 나갔다가, 어버이를 봉양하고자 풍기에서 가까운 단양군수(丹陽郡守)를 자청하여 간 후, 그가 봉장(封章)을 올려서 고을의 세금을 면제해주기를 청하자, 유랑민과 도망간 자들이 단양으로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임기가 끝났는데도 고을 백성들의 간청으로 1년을 더 머물렀다. 1588년(선조21) 서울로 가서 벼슬길에 나아갔다가 자신이 늙었음을 탄식하고 풍기로 돌아와서는 서울 땅을 다시 밟지 않았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는데, 행조(行朝)에서는 군량미를 구하지 못하여 어찌할 방도를 모르고 있었다. 황응규는 자기 집 곡식 수백 석을 내놓고, 고향 사람들로 하여금 곡식을 거두어 제로(諸路)의 군영(軍營)에 납속(納粟)하게 하였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황응규는 75세에 정3품상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승품되었다. 1594년(선조27) 병조에서 그가 군영에 납속한 실적을 장계하니, 조정에서 그를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하고, 돈녕부 동지사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노병으로 사은(謝恩)하기가 어렵다고 간절히 사양하고 시무(時務)에 관한 일을 상소하였다. 나이가 80세가 가까운데도, 비분강개하여 풍기 고을에서 의병(義兵)을 일으키도록 창도하고 의병들에게 의기(義氣)를 북돋우니, 고을 사람들이 그를 ‘향병대장(鄕兵大將)’으로 추대하였다.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미를 수합하다가, 1598년(선조31) 7월 14일 노병으로 그의 별장인 정암(正菴)에서 돌아갔는데, 향년이 81세였다.
저서로 『송간고(松澗稿)』가 남아 있다.
[성품과 일화]
황응규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타고난 자질이 너그럽고 시원하여 큰 절의가 있었으므로, 일을 할 때에는 전혀 구차한 것이 없었다. 성품이 검약하여 화려하게 꾸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옷은 헤질 때까지 입고 다녔으므로 항상 허름한 옷차림새였다. 자제를 가르칠 때 훈계하기를, “오직 학문을 부지런히 하고 행실을 돈독히 하라.”고 하였다. 방 하나에 책을 가득히 쌓아두고 권태를 잊은 채 책을 읽고 사색에 잠겼으며 때때로 한묵(翰墨)에다 자기 생각을 담았다. 어린 시절 놀이도 다른 아이들과 달랐고, 주변에서 부지런히 글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읽은 글을 논할 때에는 대의(大義)를 잘 파악하였으며, 초서(草書)를 잘 썼다. 자라서 주세붕을 사사하였는데, 주세붕은 그가 크게 될 인물로 점지하였다.
아버지 상을 당하였을 때는 여묘살이를 하였고, 어머니 상을 당하였을 때는 그가 어렸지만 어른처럼 소식(素食)하였다. 형 황윤규(黃潤奎)와 같은 마을에 살면서, 재물이 생기면 반드시 형에게 양보하고, 잘못이 있으면 간언을 하였다. 동생 황서규(黃瑞奎)가 일찍 세상을 뜨자, 그의 자녀들을 데려다가 길러서 혼인시키기를 마치 자기가 낳은 자식처럼 하였다. 여가를 내어 복건(幞巾)을 쓰고 청려장(靑藜杖)을 짚고 태백산 속에 노닐면서 천석(泉石)을 시로 읊었다. 고을의 부로(父老)들에게 권유하여 각기 서당을 세우고 자제들을 가르치도록 하였는데, 불과 몇 해만에 어린아이들이 모두 학문을 배워서 온 고을이 교화되었다. 만년에 벼슬길을 포기하고 풍기로 돌아온 뒤에는 벼슬은 물론하고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도 사양하고 지냈다. 그러나 시비(是非)에 관한 일이 생기면 반드시 분명하게 판별하고 나서야 그만두니, 선량한 사람들은 그를 무척 좋아하였다. 그가 별세하기 전날 밤에 여자들을 모두 자기 방에서 물러가게 하였다. 그리고 관복(冠服)을 가져오게 하여 차려 입고 편안히 자리에 누워 세상을 떠났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상도 순흥(順興) 서쪽 봉황산(鳳凰山) 거묵동(去墨洞)의 선영에 있는데, 부인의 묘소 오른쪽에 묻혔다. 이산해(李山海)가 지은 비명이 남아 있다.(『아계유고(鵝溪遺稿)』 권6) 부인 여흥이씨(驪興李氏)는 의빈부 도사 이수려(李壽旅)의 딸인데, 그보다 32년 먼저 죽었다. 자녀는 3남 1녀를 두었는데, 차남 황섬(黃暹)은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도승지를 지냈고, 3남 황시(黃是)는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응교를 지냈으며, 딸은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의 처가 되었다. 손자로서 황섬의 아들 황유중(黃有中)은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좌랑을 지냈다. 사위 유영경이 정인홍(鄭仁弘) · 이이첨(李爾瞻)과 권력 다툼 끝에 패배하는 바람에 멸문의 화를 입었으며, 황섬 · 황시 · 황유중도 화를 입고 풍기에 은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