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총론]
[1560년(명종15)∼1633년(인조11) = 74세]. 조선 중기 선조~인조 때의 문신. 자는 일지(一之), 호는 월담(月潭)이다. 본관은 창원(昌原)이고, 주거지는 서울인데, 세거지는 강원도 철원(鐵原)이다. 아버지는 영춘현감(永春縣監) 황수(黃琇)이고, 어머니 고성이씨(固城李氏)는 정랑(正郞) 이준(李浚)의 딸이다. 종친부 전부 황탕경(黃湯卿)의 손자이고, 관찰사 황경중(黃敬中)의 형이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와 풍기군수(豊基郡守) 주세붕(周世鵬)의 외조부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89년(선조22) 30세에,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주관한 생원진사시에서 장원으로 뽑혔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서 선조가 의주로 피난을 가자, 그는 동지들을 규합하여 뱃길로 행재소(行在所)를 찾아갔다. 조정에서 그를 특별히 전함사(典艦司)별제(別提)로 임명하였으나 얼마 후 부모가 강원도 산골로 피난했다는 소식을 듣자 사임하고 가족을 찾아 지켰다. 이후 경양도찰방(景陽道察訪)에 임명되었다가, 내섬시 직장으로 옮겼다. 1597년(선조30) 세자익위사 위솔(衛率)로 있다가 호조 좌랑으로 옮겼다. 1598년(선조31) 송화현감(松禾縣監), 1603년(선조36) 형조 좌랑을 거쳐, 1604년(선조37) 공조 정랑에 임명되었다가, 군기시 판관으로 옮겼다. 1606년(선조39) 47세로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병과 급제한 후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로 나갔다가, 1608년(선조41) 예조 정랑, 사헌부 지평을 차례로 맡았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09년(광해군1) 부사직으로 있다가 금산현령(金山縣令)으로 나갔으나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고향 철원에 가까운 양근현감(楊根縣監)으로 옮겼다. 이어 성균관 직강과 통례원 상례를 지냈다. 이항복(李恒福)의 천거로 안변부사(安邊府使)가 되었는데, 그가 안변부를 떠난 뒤에도 그곳 사람들이 그의 선정을 칭송하였다. 함경도관찰사가 조정에 “황근중이 이미 떠났는데도 백성들이 더욱 그를 사모하고 있습니다.”라고 상언(上言)하자, 조정에서 황근중을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하였다. 1614년(광해군6)에 강원도관찰사, 1615년(광해군7)에 동부승지, 좌부승지를 역임하였다. 1616년(광해군8)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외직(外職)을 자청하였으나 홍주목사(洪州牧使)로 나가게 되자 그는 부모와 멀리 떨어질 수 없다고 사양하여, 춘천부사(春川府使)에 임명되었다. 1621년(광해군13) 전라도관찰사로 나갔는데, 조정에서 그가 행정과 군비(軍備)를 제대로 수칙(修飭)하였다며 그를 종2품상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품하고 임기가 차더라도 교대하지 말도록 하여 1623년(인조1)에야 체직되었다.
[인조 시대 활동]
1623년 3월 <인조반정(仁祖反正)> 직후에,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그가 재물을 탐하고 궁금(宮禁)에 아첨하며, 세도가에게 뇌물을 주고 관직을 얻었다고 탄핵하는 바람에 파직되었다.(『인조실록(仁祖實錄)』 ·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참조) 반정 공신들이 권력을 잡고 남을 함부로 비방하는 것을 보고 실망하여, 그는 “나는 노쇠하고 병이 들었는데, 어찌 돌아다니며 구차하게 벼슬을 구하겠는가?”라고 말하고 벼슬에서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고향 철원으로 돌아가 시골 부로(父老)들과 술잔을 기울이거나 농사를 짓고 낚시를 하는 사람들 속에 뒤섞여 느긋하게 살면서 세상의 물욕을 마음속에 두지 않았다. 1626년(인조4) 조정에서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 행 용양위 부호군으로 임명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인조편) 그는 비록 시골에 살면서 세상과 인연을 끊었지만, 1627년(인조5)에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집안의 재화(財貨)를 출연(出捐)하여 의병(義兵)을 일으키도록 도왔다. 고향 철원에서 8년 동안 은거하다가, 1633년(인조11) 1월 돌아가니, 춘추가 74세였다.
[성품과 일화]
황근중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타고난 자질이 너그럽고 후덕하며, 배우는 데에 방향이 있음을 일찍이 알았다. 남과 교제하는 데에도 변함이 없었다. 송상인(宋象仁)이 무고를 당하여 절도(絶島)에 유배되었을 때 사람들이 모두 그를 피하였으나, 오로지 황근중만은 그의 안부를 묻고 물품을 보내주면서 변함없이 돌봐주었다. 송상인은 “옛사람의 과절(姱節)이 있다.”고 그를 칭찬하였다. 관직에 있을 때에는 일처리가 능숙하여 적체되는 사무가 없었고, 도리에 어긋나는 정사가 없었으며, 부임하는 곳마다 반드시 기념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중년에 당상관에 올라 조정에 출입하면서 국가의 광채(光彩)가 되었는데도, 스스로 만족한 것을 알고 멈출 줄을 알았다. 그리하여 자기 재덕(才德)을 감추고 몸을 숨겨 자기 향리에서 편안하게 지냈으니, 마지막까지 길상(吉祥)을 얻은 셈이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강원도 철원(鐵原) 범애동(汎愛洞)의 선영에 있는데, 부인과 합장되었다. 같은 동향 출신 동주(東洲) 이민구(李敏求)가 지은 신도비명이 남아 있다.(『동주집(東州集)』 문집 권7) 부인 광주노씨(光州盧氏)는 노대충(盧大忠)의 딸인데, 자녀는 2남 2녀를 낳았다. 장남 황영(黃泳)은 첨정을 지냈고, 차남 황환(黃渙)은 현령(縣令)을 지냈다. 장녀는 판서 정광성(鄭廣成)에게 시집가서,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와 참판 정치화(鄭致和)를 낳았고, 차녀는 주문보(周文俌)에게 시집가서 도승지 주세붕(周世鵬)을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