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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69년(선조2)∼1630년(인조8) = 62세]. 조선 중기의 선조~인조 때의 문신. 자는 직지(直之), 호는 오촌(梧村)이다. 본관은 창원(昌原)이고, 주거지는 서울이고, 세거지는 철원(鐵原)이다. 아버지는 영춘현감(永春縣監) 황수(黃琇)이고, 어머니 고성이씨(固城李氏)는 좌랑 이준(李浚)의 딸이다. 종친부 전부 황탕경(黃湯卿)의 손자이고, 강원도관찰사 황근중(黃謹中)의 동생이다. 영풍군(永豊君) 신율(申慄)의 문인이다.
[선조 시대 활동]
1602년(선조35) 34세로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에 보임되고 춘추관 사관(史官)을 겸임하였다. 1603년(선조36) 예문관 검열에 임명되었고, 1604년(선조37) 승문원 주서와 예문관 대교가 되었으며 세자시강원 설서를 겸임하였다. 그때 홍문관 정자에 의망(擬望)되었으나, 아첨 잘하는 친구가 그 자리에 들어가는 바람에 오위도총부 사과로 밀려났다. 그러나 그는 개의하지 않고 예전과 똑같이 그와 사이좋게 지냈다. 1605년(선조38) 홍문관 부수찬이 되었고, 1606년(선조39) 병조 좌랑에 임명되었다가, 병조 정랑으로 승진하였다. 1607년(선조40) 홍문관 수찬, 부교리, 성균관 전적을 거쳐 사간원 헌납으로 승진하였다. 1608년(선조41) 세자시강원 사서를 겸임하여, 강학관(講學官)으로서 광해군을 가르쳤고, 홍문관 수찬과 교리를 역임하였다. 강원도에 암행어사로 나가 마침 수재를 당한 수재민들을 진휼하였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08년 2월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할 때 명(明)나라에서 왕자의 서열 문제로 사신을 보냈다. 그러자 삼사(三司)에서는 임해군(臨海君)을 탄핵하여 진도(珍島)로 유배시켰다가 이듬해 강화도로 옮겨서 죽였는데, 이때 황경중은 홍문관 교리로서 임해군을 탄핵하는 데 참여하였다. 1609년(광해군1) 선천군수(宣川郡守)로 나갔다가, 1610년(광해군2) 예조 낭관에 임명되었으며 1611년(광해군3) 사신의 서장관이 되어 중국 명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1612년(광해군4) 중추부 첨지사를 거쳐 강원도관찰사로 나갔는데,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되고, 공신(功臣)에 책훈되었다. 1615년(광해군7)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임명되었고 공청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다시 도총부 총관으로 승진하였다. 1618년(광해군10) 부모상을 연이어 당하였고, 상례를 마친 후, 1621년(광해군13) 분 병조 참판에 임명되고 회창군(檜昌君)에 봉해졌으나, 대북파의 전횡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였다.
[인조 시대 활동]
1623년 3월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서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즉위하자, 이조(吏曹)에서 비목(批目)을 올려 그가 임해군 옥사 때 삼사의 관원이었으므로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 것을 아뢰니, 인조가 윤허하였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인조편) 그러나 곧 동부승지로 발탁되어 인조에게 건의한 바가 많았으므로, 인조가 그에게 숙마(熟馬) 1필을 하사하였다. 1624년(인조2) 고향 철원에 있다가 <이괄(李适)의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행재소(行在所)로 가니, 인조가 파주목사(坡州牧使)로 임명하였다. 1625년(인조3) 김해부사(金海府使)로 나가서 선정을 베풀었다. 1627년(인조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김해의 군사를 급히 거느리고 약속한 기한에 도달하였으나, 경상도병마사(慶尙道兵馬使) 조기(趙琦)는 날짜를 어겼다고 벌을 주었다. 그해 원주목사(原州牧使)로 나갔다가 1629년(인조7) 창원부사(昌原府使)로 옮겼는데, 1630년(인조8) 11월 27일 창원의 임소(任所)에서 병으로 돌아가니, 춘추가 62세였다.
[성품과 일화]
황경중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멀리서 바라보면 생김새가 의젓하며, 기품이 엄중하고 국량(局量)이 넓어서, 사람들이 모두 재상이 될 인물이라고 칭송하였다. 평생 동안 효성과 우애가 남달랐고 사람들을 성의로써 대하였다. 여러 조카들을 마치 자기 아들처럼 사랑하였고, 궁핍한 사람을 보면 반드시 여러 가지로 도와주었다. 자녀와 조카들을 엄하게 훈계하였고, 하인들을 올바른 도리로 다스렸다. 비록 한가하게 집에서 쉬는 때에도 태도가 흐트러지지 않고 반듯하며 점잖았다. 친척을 만나면 아무리 집이 가난해도 오히려 술을 대접했고, 마을 사람들과 전별(餞別)할 때에도 술잔을 주고받았다. 남을 상대할 때에는 사사로운 온정이 넘쳤으나, 일을 할 때에는 마치 성벽처럼 늠름하게 버티고 서서 꿋꿋하게 일을 처리하였다. 성품이 소탈하고 수더분하였으나 억지로 남들과 어울리려고 하지 않았고, 성격이 너그럽고 평이하였으나 남에게 함부로 흔들리거나 굽히지 않았다. 재주가 특히 분석하고 결단하는 데에 뛰어나서, 전후로 극무(劇務)를 다스리거나 송사(訟事)를 결단하는 데에 마치 귀신처럼 정확하게 일을 처리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침착하고 신중하였으나, 남에게 글을 배우는 데에는 민첩하였으므로, 관례(冠禮)를 치르고 나서부터 시(詩)를 잘 짓는다는 명성이 자자하였다. 관학(館學)과 과장(科場)에서 번번이 일등으로 뽑혔고, 일등이 아닐 때에도 높은 등급으로 뽑혔다. 1590년(선조23) 나이 22세 때 성시(省試)에서 한 글자를 잘못 쓴 까닭에 낙방하였다. 고시관(考試官)들이 아깝게 여겨 탄식하였으나, 그 시가 당대에 사람들의 입에 회자(膾炙)되었다. 정사를 다스릴 때에는 잗단 은혜를 베풀지 않고 먼 안목으로 계획하여 추진하였다. 관직에 있을 때에는 매우 행정을 간소하게 처리하니, 간혹 행정이 너무 무르다고 하면, 그는 웃으면서, “이것도 또한 나라의 은혜이다.” 하였다. 외직에 오랫동안 불우하게 머무르자 식자(識者)들이 안타깝게 여겼으나, 그는 오히려 느긋하게 여겼다. 그가 오래 사귄 친구 중에서 그의 신의를 저버린 자가 있었는데, 그는 평생 변함없이 친구를 대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지는 처음에 강원도 철원 유천리(流川里)에 있었는데, 효종 때 강원도 철원 범애동(汎愛洞)의 선영으로 이장하였다. 설봉(雪峰) 강백년(姜栢年)이 지은 묘지명이 남아 있다. 부인 전의이씨(全義李氏)는 사도시 첨정 이응지(李應祉)의 딸인데, 1남을 낳았다. 외아들 통덕랑(通德郞) 황흡(黃潝)은 일찍 죽었으나, 4남 1녀를 낳았다. 맏손자 황도명(黃道明)은 잠곡(潛谷) 김육(金堉)의 사위로서 서산군수(瑞山郡守)를 지냈고, 막내손자"
황도굉(黃道宏)은 과거에 급제하여 예조 정랑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