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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49년(명종4)∼1591년(선조24) = 43세]. 조선 중기 선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태고(太古), 호는 양재(養齋) · 하의자(荷衣子)이다. 본관은 남양(南陽)인데,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생원 홍인우(洪仁祐)이고, 어머니 순천김씨(順天金氏)는 김희직(金希稷)의 딸이다. 21세때 종숙부 평산부사(平山府使) 홍인범(洪仁範)의 양자가 되었다. 중추부 첨지사 홍덕연(洪德演)의 손자이고, 이조 판서 홍진(洪進)의 아우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선조 시대 활동]
1570년(선조3) 22세로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고, 1572년(선조5) 24세로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 급제하였다. 관례대로 승문원 정자에 보임되었다가, 춘추관의 사관(史官)을 겸임하였다. 1573년(선조6) 홍문관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고, 1574년(선조7)에 정자, 1575년(선조8)에 저작과 박사, 1577년(선조10)에 부수찬으로 승진하였다. 이어 예조 좌랑과 병조 좌랑을 역임하였는데, 항상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1580년(선조13) 예조 정랑에 임명되었고, 1581년(선조14) 병조 정랑으로 옮겼는데, 그때 암행어사로 임명되어 경기도 지방을 염찰하였다. 돌아와서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었다가, 교리로 승진하였다. 1583년(선조16)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 이때 양사(兩司)에서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탄핵하자, 이를 반박하다가 장연현감(長淵縣監)으로 좌천되었다. 그는 부임 후, 황해도 장연성(長淵城)을 수축하고 『장연성갈지(長淵城碣誌)』를 편찬하였다. 장연현감으로 연임되었으나 4년 만에 병으로 사임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1588년(선조21) 병조 정랑에 임명되었다가, 1589년(선조22) 홍문관 교리로 옮겼고, 의정부 검상과 의정부 사인을 거쳐, 사헌부 집의에 임명되었다. 1591년(선조24) 양모(養母) 광산김씨(光山金氏)의 상을 당하여 여막살이를 하다가, 상기(喪期)를 마치지 못하고 7월 12일 여막에서 돌아가니, 나이가 겨우 43세였다.
저서로는 『하의집(荷衣集)』 · 『하의시십(荷衣詩什)』이 있고, 작품으로 시조 한 수가 전한다.
[성품과 일화]
홍적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천품이 남달리 총명하였는데,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고, 학덕이 높은 분을 찾아가서 그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벼슬하는 동안, 당파싸움 속에 세상의 도덕과 의리가 땅에 떨어졌으나, 그는 꿋꿋하게 세속을 따라 도의에 어긋나는 짓을 하지 않았으므로, 선비들로부터 추중(推重)을 받았다.
그가 6세 때인 1554년(명종9)에 아버지 홍인우가 여막살이 중에 돌아가 고아가 되었으나 형 홍진과 함께 힘써 공부하여 재주가 있다는 명성을 얻었고, 과거에도 차례로 급제하였다. 22세에 진사가 되자마자 경상도 안동의 도산서원(陶山書院)으로 이황을 찾아 가, 학문하는 요체(要諦)를 배웠다. 이황이 감탄하기를, “훌륭하다. 내 친구 홍인우가 죽지 않았구나.” 하였다. 그리하여 홍인우 · 홍적 부자는 이황의 제자가 되었다. 한편, 정여립(鄭汝立)이 학식으로 조정에 발탁되어 명성을 날리자, 많은 사람들이 따랐다. 홍적도 정여립과 교제하였으나 그 학식이 터무니없다고 판단하여 교우관계를 끊어버렸다. 그 뒤에 <정여립의 옥사>가 일어나서 사림(士林)에 화(禍)가 크게 미쳤으나, 그에게는 미치지 않았다.
홍적은 공자의 제자 자장(子張)처럼 학문을 단계적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학문하는 방법은 어버이를 섬기고 어른을 공경하는 일상생활에서 시작하여, 임금에게 충성하고 풍속을 교화(敎化)하는 학문의 이론으로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날마다 일상생활에서 인사(人事)하는 도리를 다하게 하였다. 하는 말 가운데에서는 성인의 정미(精微)한 가르침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경학(經學)에 밝아서 논변과 사색을 잘하였을 뿐만 아니라, 시문(詩文)에도 능하고 글씨도 잘 썼으므로, 당시 홍문관에서 ‘완전한 재주를 갖춘 학사[全才學士]’라고 불렸다. 그의 시는 절묘하고 아름다워서, 품격이 매우 높았다. 그의 격조 높은 시만 모아서 시집으로 편찬한 것이 『하의집(荷衣集)』이다. 필법(筆法)은 중국 진(晉)나라 종유(鍾繇)와 왕희지(王羲之)를 본받았으나, 만년에는 당(唐)나라 회소법사(懷素法師)의 서체(書體)를 좋아하였다.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은 그의 글씨에 대해 “홍적의 재주는 당세에 견줄 만한 자가 드물다.”라고 칭찬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서울시 도봉산(道峯山) 회룡동(回龍洞)의 동북쪽 언덕에 있는데, 둘째부인과 합장하였다. 미수(眉叟) 허목(許穆)이 지은 묘갈명이 남아 있다. 첫째부인 당진한씨(唐津韓氏)는 대사헌 한숙(韓淑)의 손녀인데, 후사가 없었다. 둘째부인 청주한씨(淸州韓氏)는 증 영의정 한효윤(韓孝胤)의 딸인데, 자녀는 2남 1녀를 두었다. 장남 홍여익(洪汝翼)은 돈녕부 도정을 지냈으며 차남 홍여량(洪汝亮)은 형조 정랑을 지냈고, 딸은 한성부서윤 강홍적(姜弘勣)의 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