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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15년(중종10)∼1554년(명종9) = 40세]. 조선 중기 중종~명종 때의 유일(遺逸). 자는 응길(應吉), 호는 치재(耻齋)이다. 본관은 남양(南陽)이고, 주거지는 경기도 여주(驪州)이다. 아버지는 중추부 첨지사 홍덕연(洪德演)이고, 어머니 용인이씨(龍仁李氏)는 우후(虞候) 이사량(李思良)의 딸이다. 성균관 사성 홍이평(洪以平)의 손자이고, 병조 참의 홍인서(洪仁恕)의 4촌이다. 동강(東岡) 남언경(南彦經)의 처남이고,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명종 시대 활동]
1537년(중종32) 18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그러나 개성으로 서경덕을 찾아가 경의(經義)를 묻고 토론하였고, 이황이 서울에 와 머물 때에는 그곳으로 찾아가 주자학의 이론을 배우고 토론하며, 과거를 위한 공부를 버리고 위기지학(爲己之學)의 성리학 이론과 실천을 연마하였다. 과거 시험 준비에 별로 마음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대과(大科)에 거듭 실패하였다. 성균관에 있을 때 성균관 유생들과 격렬하게 예론에 대하여 논쟁을 벌였는데, 그는 경서(經書)에 근거해서 나라의 예법이 세워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중용(中庸)』의 수장(首章)과 『대학(大學)』의 성(誠) · 정(正) · 수(修) 3장에 더욱 힘을 기울여서 연구하고 체험(體驗)하는 것을 일생 동안 공부하는 근본으로 삼았다. 홍인우는 윤은보(尹殷輔)의 질문에 답한 글에, 학문에 있어서 실제를 터득하는 길이 천차만별(千差萬別)이지만 모두 하나의 근본에서 나온 것이라는 그의 생각을 담았다. 학문의 이론과 실천에 대한 그의 일언일행(一言一行)은 모두 칼로 끊은 듯이 분명하고 정연(整然)하였다고 한다.
교유한 사람들은 모두 당세의 명현(名賢)이었다.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 초당(草堂) 허엽(許曄)과는 가깝게 지냈고 학문적으로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다. 노수신은 인종(仁宗)이 세자로 있을 때 세자시강원 사부였는데, 서연(書筵)에서 강설(講說)하다가 간혹 의심나는 점이 있으면 홍인우에게 질문해서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서경덕은 “학문에 뜻을 둔 사람들을 많이 겪어보았으나, 함께 토론하여 학문이 진보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홍인우 한 사람뿐이다.”라고 그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는 이황을 사사(師事)하여 성리학의 이론을 토론하였는데, 이황은 “언제나 그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가 보면, 막혔던 바가 시원하게 씻겨 내려가는 것을 느끼게 된다.”라고 칭찬하였다.
1545년(인종1) 인종이 승하하자, 그는 초상 때에는 물만 마셨고, 성복(成服)하고 나서는 그 달 내내 소식(疏食)하였다. 남언경이 홍인우의 학문 이론과 의로운 행동을 널리 알린 덕에 그는 사림의 인정을 받았다. 1553년(명종8) 아버지 홍덕연이 소갈병으로 벼슬을 사임하고 고향 여주에서 몸을 정양하다가 돌아가자, 효성이 지극했던 홍인우는 죽만 마시고 피눈물을 흘리면서 여막살이를 하다가 1554년(명종9) 11월 10일 40세의 나이로 여막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여막살이 중에도 이황의 당부에 따라 이황과 학문에 관련된 서간을 주고 받았다.
저서로는 『치재집(耻齋集)』 · 『치재일기(恥齋日記)』 등이 있다.
[성품과 일화]
홍인우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자질이 아름답고 성품이 온순하고 중후(重厚)하였다. 새벽녘에 닭이 울면 잠자리에서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 빗고 책상 앞에 단정히 앉아서, 하루 종일 책을 읽고, 밤에는 깊은 사색에 잠겼다. 그가 항상 즐겨 읽던 책은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뿐이었고, 책상에는 다른 잡서(雜書)가 없었다. 율신(律身)과 행실은 한결같이 『소학(小學)』을 따랐으므로, 언행이 일치되고 표리(表裏)가 다르지 않았다.
혼자 한가하게 있을 때에도 그는 공자의 “혼자 있을 때를 삼가라[愼獨]”는 가르침에 따라서, 예복을 입고 엄숙하게 앉아서 더욱 조심하고 삼갔다. 부인이 묻기를,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이 공경하기를 극진히 하십니까.” 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위에서는 하늘이 밝게 내려다보고, 아래에서는 땅이 내 몸을 싣고 있으며, 그윽한 곳에서는 귀신들이 가득하고, 밝은 곳에서는 처자(妻子)들이 곁에 있으니, 내가 어떻게 공경하고 엄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임하필기(林下筆記)』 권8) 홍인우는 처음에 자기 호(號)를 ‘경재(敬齋)’라고 쓰다가, 나중에 ‘치재(耻齋)’라고 바꾸었다. 초당 허엽이 그 까닭을 물으니, “지난 세월을 돌아보니, 한 가지도 성취한 바가 없으므로, 장차 세속의 보통 사람을 면치 못할 듯하기 때문에 호를 바꾸어서 나를 격려 분발시키려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1519년(중종14)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와 그 제자들이 모두 화(禍)를 당하여 조광조가 남긴 글들을 미처 정리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지론이나 행적을 서술하는 것마저 사람들은 모두 화가 미칠까봐 두려워하였으므로, 제대로 편차(編次)된 기록이 없었다. 홍인우는 시간이 오래가면 오래갈수록 조광조의 글이 민멸(泯滅)되어 후세에 전하지 못할까 걱정하여, 사실에 의거해서 글을 발췌하여 행장(行狀)을 편차해 후세 학자들이 참고할 전거(典據)로 만들었다. 또 홍인우는 관동 지방을 유람하고 『관동일록(關東日錄)』이라는 기행문을 지었다. 퇴계 이황이 발문(跋文)을 써서 칭찬하였고, 편차가 일목 요연(一目瞭然)하여 읽기에 편리하며 그 문장이 섬세하고 내용이 풍부하다고 알려져 사림에서 많이 애송(愛誦)되었다. (『동각잡기(東閣雜記)』 하권)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여주 북쪽 대송리(大松里) 언덕에 있으며, 만전(晩全) 홍가신(洪可臣)이 지은 비명이 남아 있다.(『만전집(晚全集)』 권5) 죽은 뒤에 당양부원군(唐陽府院君)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여주의 기천서원(沂川書院)에 제향되었다. 부인 여수김씨(麗水金氏)는 군수(郡守) 김희직(金希稷)의 딸인데, 자녀는 2남 2녀를 두었으니, 장남 홍진(洪進)은 문과에 급제하여 당흥부원군(唐興府院君) 이조 판서를 지냈고, 차남 홍적(洪迪)은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집의를 지냈다. 장녀는 제용감 정 이경률(李景㟳)의 처가 되었고, 차녀는 사평 이문회(李文會)의 처가 되었다. 손자 홍진의 아들 홍여율(洪汝栗)은 퇴계 이황의 손자 이안도(李安道)의 사위로서 군수를 지냈고, 홍적의 아들 홍여량(洪汝亮)은 형조 정랑을 지냈다. 홍인우의 후손 중에는, 홍인우가 아버지 홍덕연의 상사를 다 치르지 못하고 죽은 것처럼 거상(居喪) 중에 여막살이를 하다가 죽은 이들이 있었다. 홍인우의 아들 홍적은 아버지 홍인우의 복제(服制)를 마치지 못하고 죽었고, 홍적의 손자 홍유부(洪有阜)도 아버지 홍여량의 상을 당하여 애통해 하다가 3년 상을 치른 지 겨우 한 달 만에 죽었다.(『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권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