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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64년(세조10)∼1538년(중종33) = 75세]. 조선 전기 연산군~중종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순부(純夫)이다. 본관은 남양(南陽)으로 토홍(土洪)인데,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대호군 홍귀연(洪貴演)이고, 어머니 영천이씨(永川李氏)는 좌랑 이영홍(李永弘)의 딸이다. 중추원 동지사 홍익생(洪益生)의 손자이고, 영의정 홍언필(洪彦弼)의 5촌 아저씨다.
[연산군 시대 활동]
1492년(성종23) 사마시에 합격하고, 1496년(연산군2) 33세로 식년 문과에 병과 급제하였으나 바로 부친상을 당하는 바람에, 3년 상을 마친 1498년(연산군4)에 승문원 정자로 보임되었다. 이어 기사(記事)에 뛰어난 재주가 있다고 하여, 예문관에 뽑혀 들어가 검열 · 봉교를 역임하였다. 1501년(연산군7) 승문원 교검(校檢)을 거쳐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고, 홍문관으로 들어가 부수찬 · 수찬으로 승진하였다. 1503년(연산군9) 병조 좌랑으로 옮겼다가, 사간원 헌납으로 승진하였고, 신창현감(新昌縣監)으로 나갔다. 그때 허웅(虛雄)이란 승려가, 자신을 생불(生佛)이라 하며, 온갖 병을 앓는 자들을 모두 치료한다고 말하고, 화복(禍福)의 설(說)로 백성들을 현혹하면서 여러 고을을 돌아다녔다. 허웅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모여 들어 그의 치료를 받았는데, 신창현감 홍숙도 병을 고치려고 그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허웅이 치료를 핑계로 간음한 것을 충청도관찰사가 고발하여, 의금부에서 그를 잡아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처형하였다. 홍숙도 장형 1백대에 도형 3년에 처해졌다. 1504년(연산군10)에 홍숙은 병조 정랑에 기용되었고, 이어 의정부 검상 · 사인으로 승진하였다. 1505년(연산군11) 세자시강원 보덕에 임명되었다가, 봉상시 부정으로 옮겼는데, 교서(敎書)를 반포할 때 거침없이 잘 읽자, 연산군이 칭찬하고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하여 사섬시 정으로 제수하였다. 얼마 뒤에 상호군으로 옮겼다.
[중종 시대 활동]
1505년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여하여, 정난공신(定難功臣) 3등에 책훈(策勳)되고,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되었으며 당원군(唐原君)에 봉해졌다. 1506년(중종1) 병조 참지, 이조 참의, 승정원 좌승지, 도승지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508년(중종3) 호조 참판에 임명되었다가 전라도관찰사로 나갔다. 1509년(중종4) 예조 참판에 임명되었다가 사헌부 대사헌으로 옮겼는데,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고 대체(大體)를 지키려고 힘썼다. 1510년(중종5)에 병조 참판에 임명되자, 그는 노모(老母)의 간병을 이유로 사임하였다. 1511년(중종6) 다시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다가, 공조 참판으로 옮겼다. 1512년(중종7) 경기도관찰사로 나갔고, 1513년(중종8)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품되어, 의금부 판사에 임명되었다. 이어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맡아서 경연 지사를 겸임하였고, 형조 판서에 임명되었다가 의정부 우참찬으로 승진되었다. 1515년(중종10)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가 1516년(중종11) 호조 판서에 임명되었고 중추부 지사를 거쳐 다시 우참찬이 되어 의금부 지사를 겸임하였으며 1517년(중종12)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임명되었다.
1519년(중종14) 다시 형조 판서에 임명되었는데, 그때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서 조광조(趙光祖) · 김정(金淨) · 김식(金湜) 등 사림파를 잡아들여 국문(鞫問)하고, 중종의 명령에 따라 그들을 귀양 보냈다가 사사(賜死)하였다. 기묘사화는 훈구파 중에서 홍경주(洪景舟) · 남곤(南袞) · 김전(金詮) · 심정(沈貞) 등 강경파가 주도하였다.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 이장곤(李長坤) 등 온건파는 이들을 간곡히 만류하였는데, 형조 판서 홍숙은 온건파에 속하였으나, 직책상 사림파를 처벌할 수밖에 없었다. 1520년(중종15) 형조 판서로 세자시강원 좌빈객을 겸임하였다. 1521년(중종16) 다시 예조 판서로 옮겼는데, 그는 전고(典故)에 밝아 사람들에게 ‘적격자’라는 평을 들었다. 1523년(중종18) 병조 판서에 임명되어, 군정(軍政)을 밝게 다스리고 인재를 널리 등용하였다. 1524년(중종19) 종1품하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품되어, 의정부 우찬성으로 승진되었다. 1527년(중종22) 이조 판서에 임명되어, 전주(銓注)를 공평하게 한다고 칭찬을 받았다. 이어 중추부 판사를 거쳐, 의정부 좌찬성으로 승진하였다.
[작서의 변과 복성군 옥사]
1527년(중종22) 2월 26일 <작서(灼鼠)의 변(變)>이 일어나자. 범인으로 경빈 박씨(敬嬪朴氏)가 지목되었다. 홍숙의 손자인 당성위(唐城尉) 홍여(洪礪)는 장모인 경빈 박씨의 사주로 세자(世子)를 저주하는 글을 썼다는 의심을 받았다. 그러나 중종은 이 사건을 돈녕부 영사 정광필의 의견에 따라 단순한 익명서(匿名書) 사건으로 처리하였다. 1528년(중종23) 중종은 경빈 박씨와 복성군(福城君) 이미(李嵋)를 그녀의 친정 상주로 내치고, 나이 어린 홍여는 석방하였다. 이리하여 홍여의 아버지 홍서주(洪叙疇)와 할아버지 홍숙도 무사하게 되었다. 1529년(중종24) 아들 홍서주가 의정부 검상(檢詳)에 임명되자, 의정부 찬성이던 홍숙은 상피법(相避法)에 따라 이조 판서로 옮겼는데, 그는 세 번이나 이조 판서를 사임하는 글을 올린 끝에 체직되었다. 1531년(중종26) 홍숙은 다시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다가, 중추부 판사를 거쳐, 호조 판서로 옮겼다.
1532년(중종27) 김안로(金安老)가 좌의정 심정이 경빈 박씨와 내통하여, 그 아들 복성군을 후계자로 옹립하려고 음모하였다고 무고하여, <복성군의 옥사>를 일으켰다. 상주에 있던 경빈 박씨와 복성군 모자는 사사되었고, 심정의 부자는 역적으로 몰려 죽었다. 이 옥사에 연루되어, 홍여는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는데, 혐의를 부인하다가 장살(杖殺)되었다. 홍숙은 파직되고 문외출송(門外出送)당하여 과천(果川) 상초리(霜草里)에 은거하였고, 홍서주는 전라도 무장(茂長)으로 귀양 갔다. 1536년(중종31) 홍숙은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70세를 넘은 고령으로 집상(執喪)하였다. 어머니를 여의고 지나치게 슬퍼하였고 귀양간 외아들을 다시 볼 수 없을까 근심한 나머지 병을 얻어 1538년(중종33) 1월 4일 돌아가니, 향년이 75세였다. 한편, 1537년(중종32) 우의정 김안로는 인종을 보호하기 위해 문정왕후(文定王后)를 폐위시키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그때 <작서의 변>의 진범이 김안로의 아들 연성위(延城尉) 김희(金禧)라는 사실이 밝혀져 홍숙은 신원되고 복관되었다. 홍서주는 유배지를 경기도 광주(廣州)로 옮겼다가, 1541년(중종36)에 석방되었다.
[성품과 일화]
홍숙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용모가 단정하고 엄숙하며, 과묵하였다. 타고난 성품이 침착하고 중후하여 속이 깊어서 장자(長者)다운 풍모가 있었다. 남에게 너그럽고 후덕하며, 자녀에게 자애롭고 생활이 검소하였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들과의 우애가 돈독하여, 여러 4촌 동생과 조카들을 모두 자기 집에서 자기 소생과 다름없이 길렀다. 남자들에게는 훈계를 게을리 하지 않아 반드시 학업을 성취시켰는데, 토홍 중 당시에 과거 급제하여 출세한 사람들은 그의 가까운 친척들이었다. 여자들에게는 시집갈 밑천을 장만해 혼기를 놓치지 않고 좋은 혼반(婚班)을 찾아 주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침착하고 중후하며 기량이 보통 아이들보다 비범하였다. 할아버지 · 아버지 · 큰아버지가 모두 무반(武班)이었으나, 그는 학문에 뜻을 세워 문과에 급제하고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쳐 도승지 · 판서 · 찬성에 올랐으며 중종의 신임을 받았다. 그의 외아들 홍서주는 과거에 급제하여 승지 · 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그 손자 홍여는 중종의 부마로 간택되었다. 그러자 홍숙은 너무 성만(盛滿)한 것을 두려워해서 여러 자손들에게 경계하기를, “너희들이 나라의 은혜를 입고 있는데 달리 보답할 길이 없으니, 교만한 행동을 삼가서 나에게 근심을 끼치지 않도록 하라.”고 하고, 자신의 거처와 의복과 음식부터 검소하고 절약하게 해서 자손들이 본받게 하였다. 홍숙은 나랏일을 잘 처리하였는데, 여러 사람과 논의를 거치지 않고도 다른 사람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을 모두 알아서, 업무 처리에 민첩하였다. 특히 임금에게 상소하는 소주(疏奏)와 임금의 재가를 받은 계판(啓判)의 글은 간결하면서도 자세하고 분명하여 다른 사람이 한 자도 산삭(刪削)할 것이 없었으므로, 그의 후임자들이 모두 그의 글을 표준으로 삼았다. 나랏일을 처리할 때 커다란 강령(綱領)만을 직접 챙기고, 작은 일들은 아랫사람에게 맡긴 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므로 당시 사람들이 모두 ‘대체를 아는 재상’이라고 칭송하였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장희(莊僖)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도봉산(道峰山) 울도리(鬱陶里)의 선영에 있는데, 그 무덤 아래 아들 홍서주도 묻혔다. 그의 6촌 영의정 홍섬(洪暹)이 지은 비명이 남아 있다. 부인 순흥안씨(順興安氏)는 현령 안극치(安克治)의 딸인데, 자녀는 1남 2녀를 두었다. 홍서주는 문과에 급제하여 충청도관찰사를 지냈고, 장녀는 현령 민부(閔頫)의 처가 되었으며 차녀는 사평 이공승(李公升)의 처가 되었다. 맏손자 홍여는 중종의 딸 혜정옹주(惠靜翁主)와 혼인하여 당성위가 되었으나, <작서의 변>과 <복성군의 옥사>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