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총론]
[1572년(선조5)∼1623년(인조1) = 52세]. 조선 중기 광해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익지(翼之), 호는 화옹(禾翁) · 목옹(木翁)이다. 본관은 남양(南陽)으로 당홍(唐洪)인데,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이조 판서 익성군(益城君) 홍성민(洪聖民)이고, 어머니 파평윤씨(坡平尹氏)는 연안부사(延安府使) 윤희(尹曦)의 딸이다. 황해도관찰사 홍춘경(洪春卿)의 손자이고, 영의정 홍서봉(洪瑞鳳)의 4촌이다.
[선조 시대 수난과 좌절]
1588년(선조21) 17세로 향시(鄕試)에 합격하여 명성이 있었다. 1591년(선조24) 좌의정 정철(鄭澈)이 광해군(光海君)을 세자로 책봉할 것을 주장하다가, 신성군(信城君)을 책봉하려던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실각되었는데, 아버지 이조 판서 홍성민도 정철 일당으로 몰려 함경도 부령(富寧)에 유배되었다. 당시 20세이던 홍서익은 아버지를 따라가 뒷바라지하느라 고생하였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귀양에서 풀려나자, 홍성민은 부령에서 의주(義州)의 행재소(行在所)까지 몇 천리 험한 길을 걸어서 갔는데, 이때도 홍서익은 쇠약한 아버지를 부축하여 따라 갔다. 의주에 도착한 홍성민은 대제학에 임명되었다. 그때 서울의 할머니가 돌아갔으나, 길이 막혀서 갈 수 없었다. 1593년(선조26) 서울이 수복되었으므로 홍성민은 호조 판서를 사직하고, 홍서익과 함께 서울로 돌아왔다. 홍성민은 귀양살이 중 건강을 해친 탓에 3년 상을 마치지도 못하고 1594년(선조27) 서울의 임시 거처[僑舍]에서 돌아갔다. 그때 23세이던 홍서익은 전쟁 중이었으나, 홀로 예법에 따라 치상(治喪)하여 상례를 치렀다. 그는 탈상한 다음에는 벼슬할 생각을 버리고 홀로된 어머니를 모시며 곤궁하게 살았다. 아버지의 친구들이 음서(蔭敍)의 벼슬자리를 마련하여 주었으나, 그는 부임하지 않았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09년(광해군1) 38세로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갑과 급제하였다. 그때 훈음(勳蔭)으로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되고 수안군수(遂安郡守)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어머니가 병환이 나자 사임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1614년(광해군6) 선산부사(善山府使)에 임명되었다. 1617년(광해군9) 분 병조 참의에 임명되어 중앙 정계에 발을 들여 놓았다. 그때 북인과 서인이 당파싸움으로 광해군의 정사가 혼란을 거듭하자 그는 크게 실망하고 자원하여 가평군수(加平郡守)로 나갔다. 아버지 홍성민이 정철 · 윤두수(尹斗壽) 등과 서인을 이끌던 중심인물이었으므로 홍서익은 대북의 정인홍(鄭仁弘) · 이이첨(李爾瞻) 등이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시키려 한다는 말을 듣자, 관직을 버리고 어머니와 함께 산골로 들어갔다. 1618년(광해군10) 겨울에 모친상을 당하여 여막살이를 하다가 큰 병을 얻었다. 1621년(광해군13) 병조 참의에 임명되었고, 두 번이나 성절사(聖節使) 서장관(書狀官)으로 차출되었다. 그러나 병으로 중국에 가지 못하자, 조정에서는 그가 사신으로 가는 것을 두 번이나 회피하였다고 하여 파면하였다. 이후 홍서익은 병을 앓다가 1623년(광해군15) 3월 12일에 52세로 눈을 감았다.
[성품과 일화]
홍서익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평생 남과 다투지 않았으며, 마음씨와 행동이 곧고 확실하여 외물(外物)에 흔들리지 않았다. 유건(儒巾)을 쓴 30년 동안 항상 허물어진 집에 살았고, 식량이 떨어져서 끼니를 거른 때도 있었다. 그는 가난하게 살면서도 독서를 그만두지 않았으며, 담박한 지조를 지켰다. 1623년(광해군15) 3월 12일에 병이 위독해지자,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50여 년을 살아오면서 비록 성취한 바는 없으나 부끄러운 일도 없다. 한 가지 한스러운 것은 대비가 유폐된 서궁이 다시 열리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뿐이다. 희망을 품고 죽는 것은 옛 성현(聖賢)들도 그만두지 못한 일이다. 천도(天道)로 말하면 기한이 또한 멀지 않았으니, 내가 오늘 어떻게 하겠는가?” 하였다. 이어 맏손자 홍중보(洪重普)에게 거문고를 한 곡조 타게 한 후, 평소에 좋아하던 『주역(周易)』 한 괘(卦)를 외워 이에 화답하였다. 그는 시간이 되었다고 하면서, 자리를 정돈하게 한 다음 편안하게 누워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그는 항상 『주역(周易)』을 곁에 두고 수시로 읽으면서 주역의 괘를 추첨(抽籤)하여 그것을 행동의 지표로 삼았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여주(驪州) 이포리(梨浦里)의 선영에 있는데, 낙전당(樂全堂) 신익성(申翊聖)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남아 있다. 죽은 뒤에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부인 청송심씨(靑松沈氏)는 증 판서 심종민(沈宗敏)의 딸인데, 자녀는 3남 5녀를 낳았다. 장남 홍명구(洪命耈)는 평안도관찰사로 재직 중,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강원도 김화(金化) 백전(栢田)에서 청(淸)나라 기병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차남 홍명하(洪命夏)는 문과에 급제하여 영의정을 지냈고, 3남 홍명석(洪命錫)은 일찍 죽었다. 장녀는 좌랑 김희(金繥)의 처, 차녀는 승지 임동(林埬)의 처가 되었다. 맏손자 홍중보는 우의정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