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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98년(연산군4)∼1575년(선조8) = 78세]. 조선 중기 중종~선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흠중(欽仲)이다. 본관은 남양(南陽)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익원군(益原君) 홍경림(洪景霖)이고, 어머니 함양여씨(咸陽呂氏)는 여충보(呂忠輔)의 딸이다. 중추부 지사 홍임(洪任)의 손자이고, 남양군(南陽君) 홍경주(洪景舟)의 조카이다.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고,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 · 눌재(訥齋) 이충건(李忠楗)과 절친했다.
[기묘사화와 홍봉세]
홍봉세는 조광조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성수침 · 성수종(成守琮) 형제와 이충건 등을 만나 진정한 학문을 하는 방도를 배우고 진유(眞儒)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1419년(중종15) 조광조가 대사헌이 되자, <중종반정(中宗反正)>의 공신인 정국공신(靖國功臣) 중에서 76명의 공신 작호를 박탈하였다. 이에 분개한 남곤(南袞) · 심정(沈貞) 등의 훈구파는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 조광조 · 김정(金淨) · 기준(奇遵) · 한충(韓忠) · 김식(金湜) 등을 사사(賜死)하고, 김구(金絿) · 박세희(朴世熹) · 박상(朴祥) 등을 귀양보냈다. 또 이들 사림파를 추천한 안당(安塘)을 사사하고, 사림파를 옹호하던 김안국(金安國) · 김정국(金正國) 등을 파직하였다. 이때 홍봉세의 아버지 홍경림과 큰 아버지 홍경주(洪景舟)는 훈구파의 중심인물이었다. 또 그의 사촌 누이인 희빈 홍씨(熙嬪洪氏)는 아버지 홍경주의 사주를 받아 중종에게 “천하의 인심이 조광조에게 모입니다.”라고 말하고, “조광조가 왕이 된다”는 뜻의 ‘주초위왕(走肖爲王)’ 글자가 새겨진 대궐 안의 나뭇잎을 바쳐 중종이 기묘사화를 일으키도록 부추겼다.
『중종실록(中宗實錄)』에는 조광조와 그 제자들이 심문을 당할 때, 권경(權經)이 공초(供招)하면서, 홍봉세가 “심정이 ‘주초위왕’이라는 참언(讖言)의 글을 대궐 안으로 던져 넣어 이번 화를 만들었다”라고 말했다는 것을 유기(柳淇)에게 들었다고 하였다. 여기서 홍봉세가 홍경림을 통해 홍경주의 음모를 미리 알았다고 볼 수 있다. 조광조가 사사되고 그 유해를 유배지 능성(綾城)에서 용인(龍仁)의 선산 심곡리(深谷里)로 반장(返葬)하였는데, 그 때 홍봉세는 성수침 · 이충건과 함께 달려가 장사를 지냈다. 이후로 그는 벼슬할 뜻을 버리고 20년 이상 초야에 묻혀 지냈다. 1541년(중종36) 김안국이 성수침을 유일(遺逸)로서 천거하려고 그에게 성수침의 사람됨을 물었다. 그는 성수침을 “자질이 높고 학문이 성취되었다.”라고 하고 “죽음으로써 사도(斯道)를 지킬 사람”이라고 칭찬하여, 성수침은 후릉(厚陵)참봉(參奉)이 될 수 있었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12)
[명종 시대 활동]
명종이 즉위하여 사림파를 등용하자, 아버지의 권유로 나이 40세가 넘어서 음직(蔭職)으로 벼슬길에 나갔다. 내직으로 예빈시 정 등 여러 관직을 거쳐 장례원 판결사에 올랐고, 외직으로 남양부사(南陽府使) · 춘천부사(春川府使)를 거쳐, 괴산군수(槐山郡守)와 여주목사(驪州牧使)를 지냈다. 그가 부임하는 곳마다 공평하고 청렴하게 정사를 처리하여 서리(胥吏)들이 감히 간사한 짓을 못하였다. 1554년(명종9) 예빈시 부정으로 있을 때 선수도감 낭청에 임명되어 경복궁(景福宮)을 수리하는 데 참여하였다. 그때 사재감 주부 황몽정(黃夢禎)과 함께 도감의 관원들을 공처(公處)에 초대해서 기생을 불러 잔치를 벌였다고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았다. 경복궁의 완성으로 선수도감 관원들이 포상을 받자, 홍봉세도 관직이 올랐다. 만년에 벼슬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지내다가 1575년(선조8) 12월 24일 서울집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78세였다.
[성품과 일화]
홍봉세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성품은 강직하고 엄격하며, 태도는 침착하고 중후하며, 말은 간결하였다. 스스로 욕망을 절제하였으므로, 아무리 위급할 때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위의(威儀)를 갖추었고, 하루 종일 용모를 엄숙하고 단정하게 하였으며 혼자 있을 때에도 행실이 부끄럽지 않도록 힘썼다. <중종반정> 이후에 국가에서 학문을 장려하고 신진 사류를 등용할 때, 그는 조광조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성리학을 깨우치고 진유가 되겠다는 뜻을 세웠다. 그는 날마다 여러 친구들과 어울려 강학하고 토론하였는데, 성수침 · 성수종 형제와 이충건 등과 깊이 사귀면서 학문 형성에 서로 영향을 주었다. 성수침은 성혼(成渾)의 아버지였으므로, 이들의 학문은 조광조와 이이(李珥) · 성혼을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홍봉세는 훈구파의 명문 집안 출신이면서도 신진 사림파를 자처하였다. 이는 새로운 젊은 세대가 보수파보다 개혁파를 선호하는 시대적 조류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평생 사림파의 선비로서 살았는데, 『근사록(近思錄)』 · 『중용(中庸)』 · 『대학(大學)』 등의 책들을 좋아하여 하루라도 읽지 않는 날이 없었으며, 늙어 죽을 때까지 그 공부를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광주(廣州) 남쪽 호동(狐洞)의 언덕에 있는데, 소암(疎庵) 임숙영(任叔英)이 지은 묘갈명이 남아 있다.(『소암집(疎菴集)』 권7) 부인 밀양박씨(密陽朴氏)는 동부주부(東部主簿) 박훈(朴薰)의 딸로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 홍준(洪準)은 일찍 죽고, 딸은 광흥창 수(廣興倉守) 성호문(成好問)의 아내가 되었다. 손자 홍백순(洪百順)은 현감을 지냈다. 외손녀인 성호문의 차녀는 중추부 판사 김수(金睟)의 처, 성호문의 4녀는 의정부 영의정 윤승훈(尹承勳)의 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