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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81년(선조14)∼1637년(인조15) = 57세]. 조선 중기 광해군~인조 때 활동한 문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충신이다. 자는 계통(季通), 호는 무적당(無適堂)이다. 본관은 남양(南陽)으로 당홍(唐洪)인데,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진사 홍영필(洪永弼)이고, 어머니 평양조씨(平壤趙氏)는 경력 조수(趙琇)의 딸이다. 경상도관찰사 홍명원(洪命元)의 동생이고, 영의정 홍서봉(洪瑞鳳)의 5촌 조카이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09년(광해군1) 진사시에 합격하고, 1612년(광해군4) 32세로 식년(式年)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었다가, 호조 좌랑을 거쳐, 1614년(광해군6) 북청판관(北靑判官)으로 나갔다. 1616년(광해군8) 공조 정랑에 임명되었고, 1618년(광해군10) 경성판관(鏡城判官)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이후 교외에 살면서 학문에 몰두하였다가 1619년(광해군11) 고부군수(古阜郡守)에 임명되자, 마지못하여 부임하였다.
[인조 시대 활동]
1623년(인조1)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는데,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이어 경상도 경시관(京試官)으로 나갔다. 1624년(인조2) <이괄(李适)의 반란> 때, 인조의 어가(御駕)를 공주(公州)까지 호종하였다. 환도(還都) 후에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어, 반란 당시 임금을 적진에 내버려둔 원수(元帥)들을 탄핵하였는데, 일이 실행되지는 않았으나 그의 의논이 훌륭하다는 칭찬을 받았다. 호종(扈從)한 공훈으로 승자(陞資)하여 승정원 동부승지에 발탁되었다. <정묘호란(丁卯胡亂)>을 겪은 뒤 나라의 재정이 크게 고갈되었으므로 이귀(李貴)가 조세를 늘리자고 청하였는데, 홍명형이 백성을 위해 힘껏 반대하여 시행되지 않았다. 그 무렵 민간의 재물을 침탈한 대비궁(大妃宮)의 하례(下隷)를 사헌부에서 엄하게 다스린 일이 있었다. 인조가 노하여 여러 헌관(憲官)들을 체직하라고 명하자 승지 홍명형은 이에 반대하여 상지(上旨)를 그대로 봉환(封還)하였다. 인조가 노하여 그를 폐출(廢黜)시켰으나 대신들의 구원으로 노여움은 풀었다.
승정원에서 임금의 명령인 내지(內旨)를 시행하지 않고 그대로 돌려보내는 <작환(繳還)의 법>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일로 한동안 벼슬길이 막혔다가 1627년(인조5) 울산부사(蔚山府使)가 되었고, 1633년(인조11) 형조 참의에 임명되었다. 1634년(인조12)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해로(海路)로 중국 명나라에 갔다가 등주(登州)에서 명나라 부총병(副摠兵) 정룡(程龍)을 만났다. 정룡은 모문룡(毛文龍)의 가도(椵島)를 지원하여 조선과 명나라가 후금을 협공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가 사행(使行)을 마치고 돌아와서 이를 인조에게 보고하였는데, 인조는 후금과의 전쟁보다는 화평이 낫다고 판단하고, 명나라 관리를 사사로이 만난 것을 문제 삼아 그를 파직시켰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
1636년(인조14)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홍명형은 중추부에 임용되어 승문원 부제조를 겸임하고 있었다. 인조 일행이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황급히 어가를 뒤쫓아 갔다. 그러나 적군이 길을 막아 갈 수 없었으므로, 그는 종묘사직의 신위(神位)와 비빈(妃嬪) · 왕자들이 피난 가 있는 강화도로 갔다가 서울로 돌아왔다. 가족을 데리고 다시 강화도로 떠나면서 장남인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 홍처준(洪處濬)에게 “나의 벼슬은 서관(庶官)인 너와 비할 바가 아니니, 초야에서 구차하게 살려고 해서는 안 될 몸이다. 종사의 신령이 영험함이 있다면, 나도 역시 살아남을 것이고, 불행히 그렇지 못하면 나는 마땅히 죽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당시 강화도의 방어를 맡은 강화유수(江華留守) 장신(張紳)과 여러 장수들은 강화도를 천혜의 요새로 생각하고 안이하게 대처하였다. 홍명형은 중국의 한신(韓信)이 나무 물통[木罌]을 엮어 강을 건넌 고사를 언급하며 걱정하였는데, 사람들은 그가 망언(妄言)을 한다고 도리어 비난하였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청나라 군사는 작은 배를 연결하여 갑진(甲津)을 건너 왔고, 강화도는 곧 함락되었다. 1637년(인조15) 1월 22일 홍명형은 전 우의정 김상용(金尙容), 이시직(李時稷) 등과 함께 남문루(南門樓)에서 폭사(暴死)하여 57세로 순절하였다.(『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성품과 일화]
홍명형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용모가 풍만하고 기질이 관대하고 너그러웠으나, 나라의 일을 맡아서는 과감하게 처리하고 앞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성품이 청렴하고 출세하는 데에 별로 관심이 없어 항상 대문을 닫고 숨어 살면서, 성색(聲色)을 멀리하고 오직 서사(書史)를 보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처자식이 굶주려도, 집안일에 마음을 쓰지 않았고, 곧고 올바른 기개는 조금도 꺾지 않았다. 나랏일을 하면서 직언하다가 상하의 미움을 받아 벼슬에서 쫓겨나 10년 동안 불우하게 지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난(大難)에 종묘사직이 위급하게 되자, 용감하게 목숨을 바쳐 의롭게 죽었다. 그는 효행이 지극하였는데, 부친상을 당해서 3년동안 여묘살이를 하면서 상례를 다하였다. 또 어머니를 날마다 좌우에서 즐겁고 기쁜 모습으로 모셨고, 나이 쉰 살이 넘어도 어린애처럼 재롱을 부렸다. 간소한 것을 좋아하여 가족들에게 의복과 음식을 검소하게 하였으나, 어머니를 봉양하는 데에는 개의치 않았다. 모친상을 당해서는 머리털과 수염이 모조리 하얗게 희어버릴 정도로 슬퍼하였다.
홍명형의 문장은 꾸미지 않아서 평이(平易)하였으나, 정취가 웅장하고 사리(詞理)가 정연하였다. 그가 중국 북경에 사신으로 갔을 때 명나라 예부(禮部)에 글을 보냈는데, 예부의 여러 대관(大官)들이 그 글을 읽어보고 칭찬하였다. 그의 시(詩)를 얻은 중국 사람들은 모두 공수(拱手)하면서 그의 시를 큰소리로 외었다. 평소에 그가 저술(著述)한 글이 많았으나 대부분 초고를 찢어버리거나 병란(兵亂)을 겪으면서 잃어버려, 남아 있는 글은 몇 편뿐이다. 그는 『주역(周易)』의 역리(易理)에 밝았는데, 그가 강화도에 피난을 가 있을 때, 친분이 있던 강화유수 장신이 그에게 자기 운명을 점쳐달라고 청하였다. 그는 “강화의 군비(軍備)도 믿을 것이 못될 마큼 열악한데다가, 일을 주장하는 자의 운명도 또한 이처럼 불길하니, 오랑캐가 이 섬을 함락시킬 것이 틀림없다.”고 탄식하였다. 그의 점괘대로 장신은 청나라 군사가 쳐들어오자 도망쳤다. 홍명형은 만년에 명나라 유학자 방효유(方孝孺)의 『방정학문집(方正學文集)』을 즐겨 읽으며 “이 사람의 기절(氣節)이 이와 같았으니, 그가 크게 이룩한 바가 있었던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그가 순절하자 사람들은 그가 그 책을 읽고 느낀 바가 있어 장렬하게 순절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의열(義烈)이다. <병자호란>이 끝난 후 의관(衣冠)을 가지고 충청도 충주(忠州)에 장사지냈다가, 그 뒤에 경기도 적성(積城) 송산(松山)의 선영으로 이장하고, 두 부인과 함께 합장하였다. 도운(陶雲) 이진망(李眞望)이, 그의 손자 홍수렴(洪受濂)의 부탁을 받고 지은 시장(諡狀)이 남아 있다. 죽은 뒤에 이조 판서에 추증되고, 강화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첫째부인 능성구씨(綾城具氏)는 처사 구계우(具繼禹)의 딸로, 1남 1녀를 낳았다. 둘째부인 창녕성씨(昌寧成氏)는 선전관 성문개(成文漑)의 딸이고 절효공(節孝公) 성수종(成守琮)의 증손녀인데, 5남 3녀를 낳았다. <병자호란> 때 성씨 부인은 남편이 폭사하자 목을 매어 자결하였는데, 이때 나이가 49세였다. 인조가 이 소식을 듣고 정려(旌閭)하였다. 장남 홍처준은 한성부서윤을 지냈고, 차남 홍처약(洪處約)은 강화도에서 순절하였으며, 3남 홍처정(洪處靖)은 현감을, 4남 홍처공(洪處恭)은 첨정을, 5남 홍처도(洪處道)는 현감을 각각 지냈다. 3녀는 목사 조성구(趙聖耈)의 처, 4녀는 사헌부 장령 이숙달(李叔達)의 처가 되었다. 홍처준은 홍처공의 아들 홍수렴을 양자로 삼았는데, 홍수렴은 중추부 첨사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