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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73년(선조6)∼1623년(인조1) = 51세]. 조선 중기 선조~인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낙부(樂夫), 호는 해봉(海峯)이다. 본관은 남양(南陽)으로 당홍(唐洪)인데,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진사 홍영필(洪永弼)이고, 어머니 평양조씨(平壤趙氏)는 경력 조수(趙琇)의 딸이다. 승지 홍명형(洪命亨)의 형이고, 영의정 홍서봉(洪瑞鳳)의 5촌이다. 북저(北渚) 김류(金瑬)와 남계(南溪) 조정호(趙廷虎)와 절친한 사이였다.
[선조 시대 활동]
1597년(선조30) 25세로,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 정자에 보임되었다가, 홍문관에 들어갔다. 1600년(선조33) 예문관 검열에 임명되었고, 1601년(선조34) 세자시강원 설서를 거쳐, 사서로 승진하였으며, 홍문관 수찬 · 교리를 역임하고, 성균관 전적으로 옮겼는데, 항상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으로 뽑혔고, 1604년(선조37) 사간원 헌납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홍명구가 체차(遞差) 대상인 이호의(李好義)를 하리(下吏)의 말을 듣고 출사(出仕) 대상으로 정해 말썽이 일어나자 그는 함경도도사로 좌천되어 3년 동안 재직하였다. 이 무렵 함경도의 두만강 주변에는 건주위(建州衛) 오도리족의 누르하치가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있었기 때문에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1606년(선조39) 예조 좌랑에 임명되었다가 고산도찰방(高山道察訪)으로 나갔다. 1607년(선조40) 예조 정랑에 임명되어, 훈련도감의 낭관을 겸임하였다. 1608년(선조41) 경기도 죽주부사(竹州府使)에 초배(超拜)되었는데, 고을 북쪽에 죽주산성(竹州山城)을 쌓아 요충지로 만들었다. 그때 이항복(李恒福)이 체찰사(體察使)가 되어 서로(西路)의 잔폐(殘弊)한 고을 성곽을 수축하고 군사를 점검하였는데, 홍명원과 김류를 종사관으로 삼았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10년(광해군2) 홍문관 부수찬에 임명되었고, 개성부경력(開城府歷)으로 나갔다가(『응천일록(凝川日錄)』 권1)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다. 1611년(광해군3) 이항복의 추천으로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되어 정주목사(定州牧使)에 임명되었다. 1612년(광해군4) 의주부윤(義州府尹)으로 승진되자 관례에 따라 아버지 홍영필도 참판으로 증직되었다. 1614년(광해군6) 동부승지와 좌부승지를 역임하였다. 1615년(광해군7) 그가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하여 지방관으로 나가기를 자원하자, 광해군이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하여 광주목사(光州牧使)에 임명하였다. 그의 치적이 고과(考課)에서 으뜸을 차지하였으므로, 광해군이 표리(表裏)를 하사하고, 광주 사람들의 소원에 따라서 1년을 더 잉임(仍任)시켰다. 그 무렵, 정인홍(鄭仁弘) · 이이첨(李爾瞻)의 대북(大北) 정권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幽閉)시켰다. 이항복이 이를 반대하다가 쫓겨났고, 서인들도 모두 분사관(分司官)의 벼슬로 몰려나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광주에서 안산(安山) 해곡(海谷)으로 돌아왔다. 그는 사양하였으나, 조정에서는 그를 서궁에 소속시켰다.
[광해군의 중립 외교와 홍명원의 활약]
<사르후[薩爾滸] 전투>에 조 · 명 연합군으로 참전하였다가 후금에 투항했던 조선 병사들이 1620년(광해군12) 모두 석방되어 조선으로 돌아오자 명나라는 조선이 후금과 내통하였다고 의심하였다. 명나라의 보복을 근심한 광해군은 임기응변에 능한 홍명원을 주청사(奏請使)에 임명하였다. 그는 명나라에 가서 자칭 ‘고급사(告急使)’라 하며 임박한 조선에 대한 후금 침략의 다급함을 고하고, 구원을 주청하였다. 이에 명나라 신종(神宗)은 요좌(遼左)에 주둔한 명나라 군사를 관전(寬甸) 지방으로 보내 조선의 군사와 연합하여 후금 군사를 협공하도록 하였다. 홍명원은 조선이 군사를 다시 파견할 형편이 아니라고 명나라 병부(兵部)에 정문(呈文)하여, 그 일은 중지되었다. 이때 명나라의 여러 학사(學士)들은 모두 홍명원을 “덕이 많은 군자[長德君子]”라고 일컬으며, 그가 부탁한 바를 모두 들어주었다고 한다.
명나라는 파병에 대한 사례로 유시준(劉時俊)을 보내어 내탕금(內帑金)을 우리나라의 군신(君臣)들에게 나누어 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는 조선의 실정을 탐색하려는 것이었기에 홍명원은 명나라 조정 인사들을 만나 조선이 중국 사신을 접대하기조차 어려운 형편임을 설명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홍명원의 말이 정직하다고 믿고, 황제에게 조선에 사신을 보내지 말도록 주청하고, 그 내탕금을 홍명원 편에 보내도록 하였다. 광해군이 그 말을 듣고 기뻐하였으나 이이첨은 황중윤(黃中允)을 명나라에 주청사로 보내 사신과 내탕금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응천일록(凝川日錄)』 권2) 홍명원은 귀국 길에 황중윤의 사신 파견 소식을 듣고 명나라 황제의 명령을 기다리며 중강(中江)에 머물렀다. 그러나 명나라 조정 인사의 거절로 황중윤이 황제에게 주청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자 조선으로 돌아와 명나라에서 받은 조서(詔書)와 내탕금을 광해군에게 바쳤다. 1621년(광해군13) 분 병조 참판에 임명되었을 때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 오자 광해군은 특별히 그를 영위사(迎慰使)에 임명하여 사신을 영접도록 했다. 그는 광해군 시대 명나라와의 교섭을 전담하여, 광해군의 중립 외교를 도왔다.
[인조 시대 활동]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 광해군이 축출되자, 조정에서는 광해군을 지지하는 세력들이 서울 근교에서 반란을 일으킬까봐 염려하여, 문무를 겸전한 홍명원을 경기도관찰사에 임명하였다. 그가 백성들을 형벌로써 위협하지 않고 도덕으로 교화(敎化)시켜서 덕치(德治)를 베풀었으므로, 이민(吏民)들은 모두 그를 신명(神明)하다고 일컬었다. 그러나 부임한 지 두 달 만에 병으로 사임하고 서울로 돌아오자, 백성들이 길을 막고 울부짖어 길을 갈 수가 없을 정도였다. 1623년(인조1) 5월 17일 병으로 서울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51세였다.
저서로 『해봉집(海峯集)』 3권 3책이 있다.
[성품과 일화]
홍명원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모습은 엄숙하고 장중하였으며 성격은 청렴하고 정직하였다. 그의 태도는 온화하고 평탄하면서도 행실은 방정하였다. 기량이 크고 넓으며, 재주와 지혜가 민첩하고, 문장도 누구에게 뒤지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재상감이라고 기대하였다.(『기옹만필(畸翁漫筆)』) 그는 사람을 대할 때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하고, 입으로 비속한 말을 하지 않았다. 남과 경계를 두지 않더라도 위엄이 있었고 성색(聲色)을 가까이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함부로 굴지 못하였다. 박엽(朴燁)과 정준(鄭遵)이 평안도관찰사로 있을 때 광해군의 총애를 믿고 교만 방자하게 굴어 평안도를 지나가는 사신(使臣)들이 모두 그들에게 능욕을 당했다. 그러나 홍명원이 사신에 임명되어 그 지방을 지나갈 때에는 그들이 감히 정면으로 그를 쳐다보지 못하고 조심하면서 접대하였다.
그는 집에서는 효도하고 형제들과 우애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피난 중, 맛있는 음식을 구해서 부모에게 바쳤고, 어린 동생 홍명형을 항상 업고 험한 길을 갔으며, 나이 어린 누이동생이 파도에 휩쓸리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바다에 뛰어들어 구해냈다. 형제의 고아들은 자기 자식처럼 데려다 기르고 가르쳤다. 광해군 때 정권을 잡은 몇 사람이 그의 집안과 혼인을 맺으려고 하였으나, 그는 한결같이 모두 거절하고 그 자리를 피하였다. 이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그를 싫어하여 비난하였으나, 그는 꼼짝하지 않았다.
조정에서 벼슬한 지 27년 동안 마음을 다해 봉직했는데, 관가에서는 금학(琴鶴)의 취미가 있었으나, 집안에는 좋은 물건이 하나도 없었고 오직 책 몇 상자가 있었을 뿐이었다. 공무의 여가에는 조용히 경서(經書)를 읽었으므로 집안이 마치 가난한 선비의 집처럼 조용하였다. 그의 문장은 중국 양한(兩漢) 시대를, 그의 시(詩)는 성당(盛唐) 시대를 위주로 하였다. 족부(族父) 홍서봉은 언제나 그의 글재주가 고인(古人)보다 뛰어나다고 탄복했으며, 당시 사단(詞壇)을 주장하는 자들도 모두 그 품격과 문장력이 준일(俊逸)하다고 칭찬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안산군(安山郡) 성두촌(城頭村)의 언덕에 있는데, 둘째부인이 왼쪽에 묻혔다.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묘갈명이 남아 있다. 죽은 뒤에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다시 의정부 찬성에 추증되었다. 첫째부인 양주조씨(楊州趙氏)는 조확(趙確)의 딸이고, 둘째부인 파평윤씨(坡平尹氏)는 윤민준(尹民俊)의 딸이다. 자녀는 5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홍처후(洪處厚)는 문과에 급제하여 경상도관찰사를 지냈으며 2남 홍처심(洪處深)은 현감을 지냈고, 3남 홍처윤(洪處尹)과 4남 홍처대(洪處大)는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를 지냈다. 장녀는 참판 윤지(尹墀)의 처가 되었다. 홍처후의 맏아들 홍수하(洪受河)는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장령을 지냈고, 홍처후의 넷째아들 홍수헌(洪受瀗)은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판서를 지냈다. 홍처심의 장녀는 관찰사 맹주서(孟冑瑞)의 처, 홍처윤의 차녀는 좌의정 민정중(閔鼎重)의 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