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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93년(성종24)∼1553년(명종8) = 61세]. 조선 중기 중종~명종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숙용(叔容)이다. 본관은 남양(南陽)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성균관 사성 홍이평(洪以平)이고, 어머니 광릉이씨(廣陵李氏)는 대사헌 이세필(李世弼)의 딸이다. 홍사석(洪師錫)의 현손이고,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의 문인이다.
[중종 시대 활동]
1524년(중종19) 32세로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 급제한 다음 종8품 승사랑(承仕郞) 성균관 권지 학유에 보임되었다가 1525년(중종20) 실직(實職)으로 학유에 임명되었다. 성균관 유생들을 가르치는 사유(師儒)로서 강론(講論)을 잘 하였으므로, 오랫동안 성균관에 봉직하였다. 1528년(중종23) 부친상을 당하여, 3년 상을 마친 다음 1530년(중종25) 성균관 학록에 임명되었다. 이어 1532년(중종27) 성균관 학정을 거쳐, 1533년(중종28) 성균관 박사가 되었다. 1534년(중종29) 종5품상 봉직랑(奉直郞) 성균관 전적으로 승진하였다가, 호조 좌랑과 병조 좌랑을 거쳐,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다. 1535년(중종30)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로 나갔는데, 이듬해 김안로(金安老)에게 빌붙어서 백성을 괴롭히는 주목(州牧) 한 사람을 파면하도록 강원도관찰사에게 권유하다가, 오히려 그 일당의 모함을 받아 파직되었다. 이후 여주(驪州)의 별장으로 돌아와 은거하였다.
김안로가 사사(賜死)된 이듬해인 1537년(중종32)에 병조 정랑에 기용되었다. 1539년(중종34) 봉상시 첨정, 사헌부 지평, 세자시강원 필선, 사헌부 장령을 역임하였다. 1540년(중종35) 성균관 사성이 되어 사헌부 장령을 겸임하였다. 이 해에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중국 명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왔는데, 그의 행탁(行槖)에는 오직 서적뿐이었다고 한다. 1541년(중종36) 사섬시 정으로 있다가 상주목사(尙州牧使)가 되었다. 사섬시에 있을 때, 한강에서 얼음 뜨는 일을 감독하였는데, 겨울에 뜬 얼음이 여름에 녹아버려 품질(品秩)이 강등되었던 것이다. 1542년(중종37) 성균관 사예 · 사성을 역임하였고, 1543년(중종38) 사재감 정을 거쳐 삼척부사(三陟府使)로 나갔으며, 정3품하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승품되었다. 그때 소갈병(消渴病)에 걸려 사임하고 여주로 돌아왔다.
[명종 시대 활동]
1546년(명종1) 종부시 정에 기용되었고, 1547년(명종2) 봉상시 정으로 옮겼다. 1550년(명종5)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되어 영흥부사(永興府使)에 임명되었다. 여러 해 동안 흉년이 들어 굶주리고 있던 함경도 백성들을 구휼하기 위해 과감한 시책을 펴다가 함경도관찰사의 제지를 받고 돌아왔다. 이어 충무위(忠武衛)상호군(上護軍)에 임명되었고, 1552년(명종7) 중추부 첨지사가 되었다. 1553년(명종8) 소갈병이 심해지자, 벼슬을 사임한 다음 가족을 이끌고 여주로 가 정양하다가 10월 9일 정침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61세였다.
[성품과 일화]
홍덕연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기억력이 뛰어났으며 의지와 기개가 너그럽고 컸다. 겉모양을 꾸미지 않았고, 시대에 따라 권력자에게 부앙(俯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용문산(龍門山)에서 공부할 때에, 조광조(趙光祖)와 서로 뜻과 취향이 맞아 친밀하게 지냈다. 모재 김안국에게 “유자(儒者)는 도의(道義)를 먼저 닦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듣고, 스스로 깨달아 학문의 목표를 수립하였다. 바깥으로 남을 흠모하여 이끌리지 않았으므로 그 학문과 인격을 인정하여 교제하는 사람은 적었다. 거처가 소박하고 누추했으나 마음에 두지 않았다. 형제와 우애하고 종족을 두루 구휼(救恤)하면서 서로 재산이 있고 없는 것을 따지지 않았다. 임금과 나라를 향하는 충성심은 남보다 뒤지지 않았으므로, 공소(公所)에 출근할 때에 항상 남보다 먼저 나아갔다. 간혹 천재(天災)나 시변(時變)을 만나면 걱정하고 근심하느라고 잠을 자지 못하였다. 주군(州郡)의 수령으로 있을 때에는 옥사(獄事)를 일으키는 것을 싫어하여 옥사를 확대하지 않았고, 대간으로 있을 때에는 모든 일을 원만하게 처리하였으며, 남을 논박(論駁)하여 자기 이름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다. 병중에 있을 때 궁궐에 불이 났다는 말을 듣자 자신이 당한 것보다 더욱 마음 아파하였다. 1553년(명종8) 7월에 소갈병이 심해지자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신하로서 거짓으로 병이 위독하다고 일컫는 것은 임금을 속이는 것에 가깝다. 내가 이 지경이 되어 몸을 처신하기 어려우니, 임금을 속이는 것은 아니다. 나는 가족을 이끌고 여강(驪江)으로 돌아가서 힘써 농사를 지으며 시종 편안한 마음으로 뜻을 수양하고 여생(餘生)을 마치면 충분하다.”라고 말하고 여주로 돌아갔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여주군 고달산(高達山) 관동리(官洞里)의 언덕에 있는데,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지은 묘지명이 남아 있다.(『퇴계집(退溪集)』 권47) 부인 용인이씨(龍仁李氏)는 이사량(李思良)의 딸로 자녀는 5남 3녀를 두었다. 장남 홍인우(洪仁祐)는 생원으로서 퇴계 이황의 문인이며, 손자 홍진(洪進)은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판서를 지냈고 당성부원군(唐城府院君)에 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