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홍가신(洪可臣)

서지사항
항목명홍가신(洪可臣)
용어구분인명사전
분야정치·행정가
유형인물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총론]
[1541년(중종36)∼1615년(광해군7) = 75세]. 조선 중기 선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흥도(興道), 호는 만전당(晩全堂) · 간옹(艮翁)이다. 본관은 남양(南陽)으로 토홍(土洪)이고, 주거지는 충청도 아산(牙山)이다. 아버지는 장원서 장원 홍온(洪昷)이고, 어머니 흥양신씨(興陽申氏)는 군수 신윤필(申允弼)의 딸이다. 내섬시 판관 홍윤창(洪胤昌)의 손자이고, 행촌(杏村) 민순(閔純)의 문인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67년(선조1) 27세에 진사시에서 3등으로 급제하였다. 이후에 과장에서 징계를 받았던 적이 있어 과거 공부를 그만 두고 성리학만을 공부하였다. 1571년(선조4) 음직으로 강릉(康陵) 참봉에 임명되었다가 전랑(銓郞)으로 옮겼다. 1574년(선조7) 예빈시 주부를 거쳐, 형조 좌랑으로 옮겼다가, 부여현감(夫餘縣監)로 나갔다. 1578년(선조11) 이탁(李鐸)이 천거하여 남행(南行)으로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다. 이는 그가 부여현감으로 나가 청렴하고 간결하게 정치를 잘 한다는 소문이 나서 당대를 대표하는 석학이던 성혼(成渾) · 정인홍(鄭仁弘) 등과 함께 학문과 조행(操行)으로 천거된 것이다.(『동각잡기(東閣雜記)』) 1583년(선조16) 사헌부 장령으로 승진하였는데, 이때 안여경(安汝慶)을 부윤(府尹)에 임명한 것이 합당치 않다고 끈질기게 탄핵하였다. 그러자 선조는 안여경을 부윤에서 파직시키면서 이후부터 남행 출신을 대관(臺官)에 임명하지 못하도록 하였다.(『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권22) 이어 안산군수(安山郡守)로 나갔다가, 수원부사(水原府使)로 옮겼다. 1589년(선조22) <정여립(鄭汝立)의 옥사>가 일어나자 백유함(白惟諴)의 탄핵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나 몇 년 동안 은거하였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선조의 대가(大駕)가 파천(播遷)하였다. 그는 말이 없어 어가를 호종(扈從)하지 못하자, 경기도 남양(南陽)으로 내려가서 향인(鄕人)의 자제들을 모으고 요해처(要害處)에 기포(譏捕)를 배치해 북상하는 일본군과 싸웠다. 1593년(선조26) 파주목사(坡州牧使)에, 1594년(선조27) 홍주목사(洪州牧使)에 임명되었다. 이때 홍가신은 미리 홍주 지방의 방어와 수비에 만전을 기하고 곳곳에 군사를 매복하여, 홍주성에 침입하는 일본군을 물리쳤다. 이 싸움으로 황해도 지방이 비교적 안전할 수 있었다. 1596년(선조29) <이몽학(李夢鶴)의 반란>이 일어나자 홍주목사 홍가신은 민병(民兵)을 모아 자기 촌락을 수비하게 하는 한편, 홍주에 사는 무장 임득의(林得義) · 박명현(朴名賢) 및 전 병사(兵使) 신경항(辛景恒) 등과 함께 반란군 본영을 기습하여 진압하였다.

1599년(선조32) 강화부사(江華府使)에, 1600년(선조33) 중추부 첨지사에 임명되었다. 1601년(선조34) 조정에서 찬집청(撰集廳)을 설치하고 서울과 지방의 유신(儒臣)들을 선발하여 『주역(周易)』의 구두(句讀)와 음(音)을 붙이고 그 뜻을 상세하게 해석하여 간행하는 사업을 벌였다. 이에 홍가신과 정술(鄭述) · 한백겸(韓百謙) 세 사람이 과거 출신이 아닌데도 그 선발에 들어갔다.(『임하필기(林下筆記)』 권17 참조) 1603년(선조36) 형조 참판에 임명되었고, 강원도관찰사와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로 나갔다가,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에 임명되어, 금오위 당상관을 겸임하였다. 1604년(선조37) <이몽학의 반란>을 토벌한 공으로 청난공신(淸難功臣) 1등에 책훈되었고,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품하여 형조 판서로 승진하였다. 1605년(선조38) 다시 개성부유수에 임명되었고, 1606년(선조39) 영원군(寧原君)에 책봉되었다. 1607년(선조40) 청난 공신들에게 연회를 베풀 때 선조가 특별히 홍가신을 불렀으나, 그는 병으로 연회에 나가지 못하고 글을 올려 임금에게 사례하였다. 그때 그는 풍비질(風痺疾)을 심하게 앓았는데, 선조가 의원을 보내 병을 치료하게 하고 약물을 보내주었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08년(광해군즉위) 광해군이 즉위하고 정인홍의 대북파가 정권을 잡았으므로, 그는 형조 판서를 사임하고 고향 아산으로 물러갔다. 그 무렵 정경세(鄭經世)의 상소와 관련하여 임연(任兗)과 갈등을 빚자, 광해군은 홍가신에게 “경은 공훈이 있는 중신인데, 지금 당파에 치우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라고 꾸짖었다.(『하담파적록(荷擔破寂錄)』) 『예기(禮記)』에 따라 대신이 나이 70세에 치사(致仕)하고 벼슬에서 물러나면, 임금은 안석과 궤장(几杖)를 하사하는 것이 관례였다. 1610년(광해군2년) 홍가신은 나이 70세가 되었다고 치사하였으나 광해군은 그를 싫어하여 궤장을 내려주지 않았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7) 1615년(광해군7) 그가 병이 위독하였는데, 마침 부인 이씨(李氏)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매우 슬퍼하다가, 두 달 뒤인 6월 14일 뒤따라가니, 이때 나이가 75세였다.

저서로는 『만전집(晩全集)』과 『만전당만록(晩全堂漫錄)』이 남아 있다.

[성품과 행동거지]
홍가신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사람됨이 단정하고 성실하였다. 성품이 엄격하였으나 온화하였고, 강의(剛毅)하며 행실도 돈독하였다. 청렴하고 욕심이 적은데다가 항상 직분을 다하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에 직책을 맡는 곳마다 훌륭한 치적이 있었다. 그는 문장(文章)과 사예(詞藝)를 좋아하였는데, 그 시문(詩文)은 대개 한(漢)나라 반고(班固)와 당(唐)나라 두보(杜甫)의 본을 받았다. 만년에 『주역』을 즐겨 읽었는데, 거의 침식을 잊다시피 몰두하였다. 책상과 자리를 정돈하고 무릎을 모은 후 단정히 앉아서 잠심(潛心)하여 하루 종일 책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는 가운데 후진들이 글을 배우러 찾아오면, 그 재주에 따라서 가르쳐 주고, 그 재능이 미치지 못하는 바를 억지로 배우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행촌 민순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문장이 소기(小技)인 것을 깨닫고 성현(聖賢)의 학문을 익히려고 전일(專一)하였다. 송선(宋宣)과 함께 동문수학하다가 별제(別提) 이형(李衡)의 딸들과 차례로 혼인하여 동서 사이가 되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서울에서 벼슬할 때 그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기도 하였다. 홍가신은 학행(學行)으로 사림(士林)의 칭송을 받았으나, 대관에 임명되었을 적에 동인(東人)의 편을 들어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우계(牛溪) 성혼(成渾)을 공격하였으므로, 서인(西人)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홍가신과 조원(趙瑗)은 젊었을 때부터 사귄 친한 친구였다. 1578년(선조11) 조원이 이조 좌랑이 되어 사정(私情)을 쓰는 것을 보고, “공(公)을 섬기는 사람은 사(私)를 쓸 수 없는 것이다.”라고 공격하였으므로, 두 사람의 사이가 벌어졌다. 사림에서 홍가신을 동인, 조원을 서인이라 하였는데, 사람들은 이 일을 두고 “동인이 서인과 화합하지 못하고 공격하여, 가까운 친구 사이도 이런 꼴이 되었다.”라고 개탄하였다. (『석담일기(石潭日記)』 하권) 홍가신이 수원에 있을 때 정여립이 찾아온 적이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정여립이 주자(朱子)가 수학(數學)에 밝지 못하다고 비난하자 홍가신은 그때부터 그를 훌륭한 선비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상대하지 않았다. 정여립은 이후에 역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죽었다. 그러나 이 옥사에 이발(李潑) 형제가 모함을 받아 유배를 가게 되자 홍가신은 그들을 동정하여 그들이 귀양갈 때 자신의 도포를 벗어 입혀 주었다. 그들이 결국 장살(杖殺)되자 옷을 벗어 시신을 덮어주고 몸소 시신을 염해 장사를 지내주었다. 집안 자제와 친척들이 모두 만류하자 그는 “내가 그들의 억울함을 아는데, 어찌 차마 내 몸의 화복 때문에 내 양심을 바꾸겠는가.”라며 탄식하였다. 대간에서는 홍가신이 정여립과 우정이 깊고 이발 형제와는 추앙하는 사이라고 탄핵하였으므로 결국 그는 파직당하였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문장(文壯)이다. 묘소는 충청도 아산 대동(大洞)의 언덕에 있고 부인과 합장하였다. 이현일(李玄逸)이 지은 시장(諡狀)이 남아 있다.(『만전집(晩全集)』 · 『갈암집(葛庵集)』 권29) 충청도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과 온양(溫陽)의 정퇴서원(靜退書院)에 제향되었다. 부인 재령이씨(載寧李氏)는 이형의 딸인데, 자녀는 5남 2녀를 두었다. 장남 홍은(洪檃)과 차남 홍영(洪榮), 3남 홍절(洪楶)은 모두 현감을 지냈고, 4남 홍비(洪棐)는 참판에 추증되었다. 장녀는 판관 심천정(沈天挺)의 처가 되었고, 차녀는 관찰사 신용(申涌)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만전집(晩全集)』
■ 『만전당만록(晩全堂漫錄)』
■ 『갈암집(葛庵集)』
■ 『동각잡기(東閣雜記)』
■ 『문소만록(聞韶漫錄)』
■ 『미수기언(眉叟記言)』
■ 『사계전서(沙溪全書)』
■ 『석담일기(石潭日記)』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
■ 『자해필담(紫海筆談)』
■ 『죽창한화(竹窓閑話)』
■ 『청음집(淸陰集)』
■ 『하담파적록(荷擔破寂錄)』

■ [집필자] 이현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