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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94년(성종25)∼1558년(명종13) = 65세]. 조선 전기 중종~명종 때의 문신. 자는 천장(天章), 호는 야계(倻溪) · 야계산옹(倻溪散翁)이다. 본관은 경상도 합천의 야로(冶爐)이고, 주거지는 경상도 성주(星州) 선산(善山)이다. 아버지는 부사직(副司直)송방현(宋邦賢)이고, 어머니 회산황씨(檜山黃氏)는 황진(黃珍)의 딸이다. 진례군(進禮君) 이형(李衡)의 문인이다.
[중종 시대 활동]
1513년(중종8) 사마시(司馬試)에 3등(等)으로 합격하고, 1519년(중종14) 별시(別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성균관(成均館)학유(學諭)에 보임되어 학정(學正)으로 승진하였다. 1523년(중종18) 부친상을 당하여 3년 복제를 마치자, 성균관 전적(典籍)에 임명되었다. 1528년(중종23) 공조 좌랑으로 옮겼다가,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서 현풍현감(玄風縣監)으로 나갔다. 1533년(중종28) 호조 · 예조의 정랑(正郞)에 임명되었고, 다음해 흥해군수(興海郡守)로 나갔는데, 이때 옥산(玉山)에 있던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과 서신을 왕래하면서 교분을 두텁게 쌓았다. 선공감(繕工監)부정(副正)에 임명되었다가, 제용감(濟用監)정(正)으로 승진하였고, 조금 뒤 상주목사(尙州牧使)로 나갔다. 1541년(중종36)에 모친상을 당하였고, 3년 상례를 마치자 사재감(司宰監) 정에 임명되었다가, 김해부사(金海府使)로 나갔으나, 1년 만에 병으로 사임하였다. 1543년(중종38)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되었다.
[인종∼명종 시대 대윤과 소윤의 싸움]
1544년(인종즉위) 인종이 즉위하자, 인종의 외삼촌 윤임(尹任)이 사림파(士林派)의 선비를 중용하였는데, 이듬해 그도 사헌부 장령에서 집의(執義)로 승진되었다. 1545년(명종즉위) 인종이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하자, 명종의 외삼촌 윤원형(尹元衡)은 윤임 일파를 숙청하려고 계획하였다. 윤원형은 윤임(尹任) · 유관(柳灌) · 유인숙(柳仁淑) 등에게 죄를 주라는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밀지를 받아서 대사헌 민제인(閔齊仁) · 대사간 김광준(金光準)에게 몰래 전달하였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따르면 당시 집의였던 송희규는 그 기미를 알고 동료들에게 내전에서 밀지를 내렸다고 전하였다. 다음날 양사(兩司)가 중학재(中學齋)에 모여서 회의할 때 민제인과 김광준이 이 밀지의 내용대로 발의하니 이에 대해 강력하게 저항하였다. 그리고 나라를 위해 윤원형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니 지평 김저(金䃴), 사간 박광우(朴光祐), 정언(正言)유희춘(柳希春) 등 9명의 대관(臺官)들이 호응하였다고 한다. 뒤이어 헌납 백인걸(白仁傑)이 이 문제에 대해 상소를 올리자, 명종은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백인걸을 파직한 다음 의금부에 가두고 문죄하도록 하였으며 송희규, 박광좌 이하의 관원도 아울러 파직하도록 하였다. 이에 의정부에서 언관(言官)에게 모두 죄를 주기 어려워서 백인걸만 구속하고, 집의 송희규 이하는 그 본직을 교체하였다.
1546년(명종1)에 예빈시(禮賓寺) 정에 임명되었고 그해 있었던 중시(重試)에서 2등으로 합격하여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 대구부사(大丘府使)가 되었다. 1547년(명종2) 문정왕후를 비방한 <양재역(良才驛) 벽서(壁書) 사건>이 일어나자 사헌부 집의 때의 죄를 추론(追論)당하여 고산현(高山縣)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5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다가 석방되어 고향 선산으로 돌아왔다. 호를 스스로 야계산옹(倻溪散翁)이라 하였고, 시(詩)와 술로 세월을 보냈다. 1558년(명종13) 지병으로 고향집에서 죽으니, 향년 65세였다.
저서로는 『야계선생문집(倻溪先生文集)』이 있다.
[성품과 일화]
송희규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한가로울 때에도 반드시 단정히 앉아서 구차스레 웃거나 말하는 법이 없었다. 평소에는 비록 화평(和平)한 듯하였으나, 일을 할 때에는 과단성 있게 결정하고 의심하지 않았다. 검소(儉素)한 것을 숭상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그가 관직의 낮은 품계에서 높은 품계에 이르기까지 그의 집안에는 좋은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 다섯 고을의 수령을 지냈으나 주머니는 언제나 텅텅 비었고, 아전과 백성들은 그를 두려워하여 감히 속이려 들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가는 곳마다 치적(治績)이 제일이었다. 형제와 우애가 돈독하여 그들에게 가재(家財)를 모두 나누어주고 자기 자신은 조금도 차지하지 않았다. 종족(宗族)에게 친소(親疎)를 가리지 않고 화목하였으며, 여러 수종하는 사람 중에서 가난한 자가 있으면 저축한 것이 다 없어질 때까지 구제하였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묘소는 경상도 성주(星州) 북쪽 손곡(遜谷)의 언덕에 있는데, 부인과 합장하였다. 1565년(명종20) 명종이 친정(親政)하자, 그의 직첩을 돌려주었다. 부인 선산김씨(善山金氏)는 행 호조 정랑 김광좌(金匡佐)의 딸인데, 자녀는 2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송현(宋鉉)은 문과에 급제하였고, 그 아들이 송유경(宋惟敬) · 송유신(宋惟愼)이다. 고종 때 이조 판서와 문형(文衡)을 추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