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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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응형(宋應泂)

서지사항
항목명송응형(宋應泂)
용어구분인명사전
분야정치·행정가
유형인물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총론]
[1539년(중종34)∼1592년(선조25) = 54세]. 조선 중기 선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공원(公遠)이고, 본관은 은진(恩津)인데, 주거지는 충청도 회덕(懷德)이다. 아버지는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송기수(宋麒壽)이고, 어머니 평강채씨(平康蔡氏)는 대사헌 채침(蔡忱)의 딸이다. 사헌부 장령 송세충(宋世忠)의 손자이고, 대사간 송응개(宋應漑)의 동생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58년(명종13) 나이 20세 때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과거에 거듭 낙방하자, 아버지의 권유로 음직(蔭職)으로 출사하여, 1571년(선조4) 예빈시(禮賓寺) 별제(別提)가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1572년(선조5)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4세였다. 승문원(承文院)에 들어가서 권지(權知) 정자(正字)를 거쳐 부정자(副正字)로 승진하였고, 뒤이어 승정원(承政院) 주서(注書)로 옮겼다가, 곧 호조 · 예조 · 병조 · 형조 · 공조의 좌랑(佐郞)정랑(正郞)을 두루 역임하였다.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을 아홉 번,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을 한 번,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을 한 번, 사예(司藝)를 세 번 역임하였다. 외직으로 나가서 경기도도사(京畿道道事)와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지냈고, 들어와서 사도시(司䆃寺) · 사섬시(司贍寺)정(正), 통례원(通禮院) 통례(通禮), 승문원(承文院) 판교(判校)를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25) 봄에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 황주목사(黃州牧使)에 임명되었는데,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서 선조가 몽진(蒙塵)하여 황해도로 갔을 때, 그는 병중에 있었기 때문에 행재소(行在所)에 달려가서 임금 일행을 마중하지 못하여 파직되었다. 그해 10월 낙향하던 도중에 곡산(谷山)의 임시 거처에서 죽으니, 나이는 겨우 54세였다.

[동서 분당 직후 율곡 이이에 대한 공격]
1579년(선조12) 사헌부 정언이 되었을 때 휴암(休菴) 백인걸(白仁傑)이 상소하여 동서분당(東西分黨)의 폐단을 극론하였다. 이때 동인(東人)들은 상소 속의 ‘붕당(朋黨)’이란 말이 자기들에게 불리하다고 여겨서 양사(兩司)로 하여금 그를 탄핵하게 하였다. 양사의 대간(臺諫)들이 선뜻 나서기를 주저하자, 성미가 급한 정언 송응형이 의정부 참찬 백인걸의 상소는 이이(李珥)가 자취를 감추고 대신 쓴 글로, 이는 이이가 임금을 속인 것이므로, 그 잘못을 바로 다스려야 한다며 이이를 탄핵하였다. 그리고 대간의 동료들을 설득하였지만, 대사간 권덕여(權德輿) 등은 따르지 않았다. 백인걸은 송응형의 탄핵에 대해 자신의 상소 초본을 이이가 윤문하였을 뿐이고, 이 사실 또한 다른 이들에게 숨긴 적이 없다고 변명하여 선조의 의심을 풀었다. 양사와 옥당(玉堂)에서는 이 문제를 둘러싸고 서로 시비를 벌였는데, 홍문관 부응교(副應敎)김우옹(金宇顒)이 경연(經筵)에서 이이를 비난하는 송응형과 맞서 격론을 벌이며 이이를 변론하였다. 송응형은 김우옹의 공격을 당하여 마침내 파직되었다.(송응형의 이이에 대한 탄핵 관련 내용은 『율곡전서(栗谷全書)』에 잘 남아 있다.)

동강(東岡) 김우옹은 조식(曺植)의 문인으로서 북인(北人) 계통이었으나, 오히려 동인 유성룡(柳成龍) · 김성일(金誠一)과 가까웠다. 서인 정철(鄭澈) 등과는 적대 관계였으나, 율곡(栗谷) 이이만은 존경하였다. 또 송응형과 그의 형 송응개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 송준길(宋浚吉)과 가까운 친족이었고 모두 충청도 회덕 출신이다. 선대 송응형 · 송응개 형제는 동인의 중진으로서 이이를 공격하는 데 앞장섰던 반면에, 후대 송시열은 이이를 높이 받들어 서인의 태두(泰斗)가 되었다. 이것을 보면, 동서 분당이 혈연이나, 지연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었던 것 같다.

[성품과 일화]
송응형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기상이 높고 지키는 바가 굳어서 요직(要職)에 있는 사람들에게 빌붙거나 이익을 위해 남과 영합하지 않았다. 오직 아버지 송기수의 가훈(家訓)을 지켜서 평생 벼슬할 시기를 놓친다고 해서 좌절하는 일이 없었다. 관직에서 복잡한 업무에도 요점만을 챙겨서 여유 있게 처리하였다. 그를 아는 자들은 모두 나라의 인재로서 크게 쓰이기를 바랐으나, 오래 살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지위가 수령(守令)에 그치고 말았다.

1592년 송응형이 상주목사로 있을 때, 일본 사신 타치바나 야스히로(橘康廣)를 접대했다. 이때의 일화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남아 있는데, 여기서 임진왜란 직전에 보인 일본의 오만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타치바나가 상주(尙州)를 지날 때 목사 송응형이 나와서 기생과 풍악으로 접대하였다. 그 자리에서 타치바나는 송응형의 머리털이 센 모습을 보고, “나는 수년 동안 전쟁터에서 고생하느라고 머리털이 세었지만, 당신은 음악과 기생 속에 파묻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오히려 머리털이 세었으니, 이게 웬일인가?” 라고 조롱하였다고 한다.

[묘소와 비문]
전쟁 중에 곡산(谷山)에서 죽었기 때문에 곡촌(谷村)에 임시로 장사지냈다가, 3년 후에 전쟁이 그치자, 양주(楊州)의 선영으로 묘소를 이장하였다. 그의 조카 신흠(申欽)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남아 있다. 첫째 부인 전의이씨(全義李氏)는 신천군수(信川郡守) 이종효(李宗孝)의 딸이고, 둘째 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성천부수(成川副守) 이구(李球)의 딸이다. 자녀는 4남 2녀를 두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상촌집(象村集)』
■ 『사계전서(沙溪全書)』
■ 『석담일기(石潭日記)』
■ 『송자대전(宋子大全)』
■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우계집(牛溪集)』
■ 『월정만필(月汀漫筆)』
■ 『율곡전서(栗谷全書)』
■ 『임하필기(林下筆記)』
■ 『학봉전집(鶴峯全集)』
■ 『혼정편록(混定編錄)』
■ 『사류재집(四留齋集)』
■ 『송강집(松江集)』
■ 『월사집(月沙集)』

■ [집필자] 이기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