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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52년(문종2)∼1510년(중종5) = 59세]. 조선 전기 성종∼중종 때의 문신. 자는 우경(虞卿)이다. 본관은 은진(恩津)이고, 세거지는 충청도 회덕(懷德)이다. 아버지는 예조 정랑 송순년(宋順年)이고, 어머니 안동김씨(安東金氏)는 직제학(直提學) 김맹헌(金孟獻)의 딸이다. 송씨로 회덕에 처음으로 자리잡은 쌍청당(雙淸堂) 송유(宋愉)의 증손자이고, 송시열(宋時烈)의 5대조이다.
[성종~중종 시대 활동]
1477년(성종8) 사마시(司馬試)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음보(蔭補)로 참봉(參奉)에 보임되었다가, 봉사(奉事) · 직장(直長)을 거쳐, 한성부 참군(參軍)이 되었다. 그 뒤에 사헌부 감찰(監察)로 승진하였다가, 형조 · 호조의 좌랑(佐郞)으로 전임하였다. 1494년(성종25) 별시(別試)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43세였다. 곧 정4품하 봉렬대부(奉列大夫)로 승진하여, 사헌부 지평(持平)과 사간원 헌납(獻納)을 번갈아 역임하였다. 여러 번 승진하여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 예조 참의가 되었다. 성종이 승하하던 날 딸을 혼인시켰다고 파면되어 연산군 초기 6년 동안 은거하였다. 1500년(연산군6)에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이석형(李石亨)의 아내 박씨(朴氏)가 사위 송여해를 위하여 하소연하자 연산군이 그를 서용하였다. 1504년(연산군10) 예조 참의로 있을 때, 태학생(太學生)들의 상소가 연산군의 뜻에 거슬려서 모두 하옥(下獄)되었는데, 송여해는 그것이 옳지 않다고 연산군에게 간하다가 장 80대를 맞고 옥천군(沃川郡)으로 유배되었다. 그 뒤에 중종이 즉위하자, 관례에 따라서 관직에 복귀하였으나, 강등된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는 회복되지 않았다. 제용감(濟用監)정(正)을 거쳐, 1505년(중종5) 안동부사(安東府使)에 임명되어 선정을 베풀다가, 1510년(중종5) 5월 19일 임기 중에 갑자기 객사하니, 향년이 59세였다.
[성품과 일화]
송여해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성품은 온화하고 너그러우며, 조용하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형제들 사이에는 화합을 다지고, 친구들 사이에는 신의를 지켰다. 친척과 이웃 가운데 가난하고 외로워 의지할 곳이 없는 자에게는 당사자 모르게 도와주었다. 천성이 민첩하여 지위가 더욱 높아질수록 맡은 일을 잘 처리하였다. 또 선배에게 일을 힘써 배우고 게으름을 모르고 열심히 일을 하였으므로 명성이 널리 알려지니, 대신들이 조정의 큰 일이 있을 때마다 그를 자기 보좌관으로 끌어들이려고 서로 다투었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묘소는 충청도 회덕현(懷德縣) 식장산(食藏山)의 언덕에 있는데, 그의 동서 정광필(鄭光弼)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 부인 연안이씨(延安李氏)는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이석형(李石亨)의 딸로, 자녀는 2남 2녀를 두었다. 장남 송세충(宋世忠)은 사헌부 장령을 지냈고, 그 아들 송기수(宋麒壽)는 도승지를 지냈다. 차남 송세량(宋世良)은 참봉을 지냈는데, 그 아들 송귀수(宋龜壽) · 송인수(宋仁壽)와 사위 성제원(成悌元)은 모두 유명한 유학자였고, 규암(圭菴) 송인수는 대사헌을 지내다가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화를 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