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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92년(선조25)∼1638년(인조16) = 47세]. 조선 중기 인조 때의 유일(遺逸). 자는 유휘(幼輝)인데, 본관은 은진(恩津)이고, 주거지는 충청도 회덕(懷德)이다. 아버지는 병조 좌랑 송방조(宋邦祚)이고, 어머니 진주정씨(晋州鄭氏)는 정곡(鄭谷)의 딸이다. 양부는 첨정(僉正) 송희조(宋熙祚)이고, 양모 파평윤씨(坡平尹氏)는 윤창세(尹昌世)의 딸이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4촌 형인데, 그의 4남 송기태(宋基泰)는 송시열의 양자가 되었다.
[인조 때 이이의 문묘 제향 운동]
1633년(인조11)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42세였다. 성균관에 들어가서 공부하다가, 1635년(인조13) 그가 소두(疏頭)가 되어 성균관 유생(儒生) 2백 70여 명을 이끌고,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우계(牛溪) 성혼(成渾)을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하도록 청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당시 문묘에 이황(李滉) 등은 배향되어 있었으나, 이이와 성혼은 동인의 반대로 배향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문묘 배향은 서인이 동인과 싸우는 데에 유리한 위치를 차자하려는 목적도 있었으나, 이이와 성혼은 노론의 태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스승이었기 때문에 앞으로 노론이 정국을 주도하려는 속셈도 있었다. 송시형이 조정 바깥에서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 종사(從祀)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조정 안에서 송시열(宋時烈)이 ‘변무소(辯誣疏)’를 통해 송시형의 주장을 두둔하였다. 송시형과 송시열이 조정 안팎에서 이이와 성혼을 종사하도록 청하였으나, 인조는 그들의 도덕은 높으나 문묘에 종사하는 일이기에 경솔히 할 수 없다고 하였다.
[병자호란 때 척화 활동]
1636년(인조14) 청(淸)나라의 사신 용골대(龍骨大)가 조선에 와서 청나라의 칸을 “황제”라고 부르도록 강요하자, 송시형이 성균관의 여러 유생들을 이끌고 ‘참호(僣號)’를 요청한 용골대를 즉시 참형(斬刑)할 것을 강력히 상소하였다. 조선에서 ‘황제를 참칭(僭稱)하는 후금(後金)’에 대한 적대 감정이 고조되자, 용골대는 만주로 가 버렸다. 조정의 주화파(主和派)는 통역을 급히 보내어 압록강을 건너가서 용골대를 달랬으나 끝내 실패하였다. 이때 그는 장차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감하고 큰 형 사복시 주부(主簿)송시영(宋時榮)과 함께 가족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피난가려고 하였는데, 1636년(인조14) 이미 청나랑의 대군이 대거 압록강을 건너 침입하여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다. 이때 송시형의 큰 형 송시영(宋時榮)은 강화도에 피난하였다가 강화도가 함락당하자, 친구 이시직(李時稷) · 윤전(尹烇)과 함께 자결하였다. 윤전은 송시형의 장인이었다.
1637년(인조15) 인조가 송시형을 유일(遺逸)로서 지조가 있는 선비로 보고 봉림대군(鳳林大君: 효종)의 사부(師傅)에 임명하였으나, 송시형은 사양하였다. 그때 봉림대군이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따라 청나라에 볼모로 가게 되었는데, 송시형이 대군사부를 거듭 사양하자, 인조는 그가 오랑캐 땅에 가는 것을 꺼려해서 피하는 것이라고 오해하여, 그를 하옥(下獄)시켜서 취조하도록 하였다. 그는 참혹한 형벌을 받고 감히 마음대로 말하지 못하고, 단지 병 때문에 부임하지 못한다고 핑계를 대고 겨우 석방되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옥중에서 고초를 겪었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온 지 수십 일 만인 1638년(인조16) 1월 4일에 죽고 말았는데, 그때 나이가 47세였다.
[성품과 묘소]
송시형의 타고난 바탕은 어질고 후덕하며 자애롭고 착하였다. 또 지키는 바가 견고하고 확실하여 언제나 이익을 좇거나 해로운 일을 하지 않았으며 위세를 부리거나 두려워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묘소는 충청도 청주(淸州) 청원군(淸原郡) 남쪽 사현리(沙峴里)의 선영에 있는데, 4촌 동생 송시열이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 있다. 부인 파평윤씨(坡平尹氏)는 사헌부 장령(掌令) 윤전의 딸인데, 자녀는 4남을 두었다. 장남 송기선(宋基善)은 진사(進士)이며 3남 송기명(宋基明)은 참봉이고, 4남 송기태(宋基泰)는 중추부 동지사로서 송시열의 양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