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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88년(선조21)∼1637년(인조15) = 50세]. 조선 중기 인조 때의 문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강화도가 함락되자, 순사(殉死)하였다. 자는 공선(公先) · 무선(茂先) 또는 무광(茂光)이고, 호는 야은(野隱)이다. 본관은 은진(恩津)이며 주거지는 충청도 회덕(懷德)이다. 아버지는 호조 좌랑 송방조(宋邦祚)이고, 어머니 진주정씨(晋州鄭氏)는 감정(監正) 정곡(鄭谷)의 딸이다. 봉사(奉事)송귀수(宋龜壽)의 증손자이며,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사촌형이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인조 시대 활동]
나이 40세가 되도록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자, 인조 초기에 고향 회덕 사람들이 그의 여러 가지 행실을 기록하여 관찰사에게 추천하여 음직(蔭職)을 구하였다. 마침 1627년(인조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서 후금(後金)이 침범하자, 그는 동지들을 모아서 나라를 위해 싸우려고 준비하였다. 후금 군사가 돌아가자, 그의 스승 김장생(金長生)이 그의 공로와 덕행을 추천하여, 1628년(인조6) 사재감(司宰監)참봉(參奉)에 임명되었다. 이어 봉사(奉事) · 직장(直長)을 거쳐 상의원(尙衣院)주부(主簿)로 승진하였다가 사복시(司僕寺) 주부로 전직하였다.
[정묘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
1636년(인조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당시 사복시 주부였던 송시영은 강화도로 피난하여 전 사헌부 장령(掌令)이시직(李時稷)과 같이 한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본래 두 사람은 친한 사이였다. 그때 청 태종 홍타지는 먼저 강화도를 함락해서 남한산성(南漢山城)을 항복시키려고, 그 동생 도르곤[多爾袞]에게 팔기(八旗)를 거느리고 작은 배 80척을 만들어서 강화도를 공격하게 하였다. 1637년 1월 22일 도르곤의 팔기병들이 조각배를 타고 강을 건너 강화성의 남문(南門)으로 들이닥치니, 중관(中官) 김인(金仁) 등이 원손(元孫: 소현세자의 아들)을 업고 작은 배에 올라 주문도(注文島)로 도망갔다. 그리고 대신 김상용(金尙容)은 적병이 사방으로 포위하자, 화약을 폭발시켜 13세의 손자 김수전(金壽全)과 함께 죽었으며, 공조 판서 이상길(李尙吉)은 성 밖에 있다가 강화부로 달려와서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대군과 비빈(妃嬪)들이 청나라 군사에게 잡혀가는 참담한 광경을 보고, 죽창(竹窓) 이시직이 “종사가 망하였으니, 구차히 살기를 바라는 것이 부끄럽지 않겠는가.” 하니, 송시영이 “우리가 오늘날 이런 참혹한 광경을 볼 줄 어찌 알았으랴.” 하고 자신들의 몸을 깨끗이 나라에 바치기로 결정하였다. 송시영은 즉시 그의 아들과 작별하는 글을 써서 종에게 준 다음, 가지고 있던 인신(印信)을 소리(小吏)에게 건네주고, 이시직과 함께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그때 송시영의 나이는 50세였다. 필선(弼善)윤전(尹烇), 전 감사 정효성(鄭孝誠), 전 장령 정백형(鄭百亨), 병조 좌랑 이사규(李士珪), 현감 정수(鄭洙) 등이 모두 죽었고, 순절한 부녀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강화도가 무너졌다는 보고가 남한산성에 이르자, 인조는 남한산성을 나가서 항복하기로 결정하였다.
[묘소와 추모]
시호는 충현(忠顯)이다. 묘소는 충청도 영동(永同) 서쪽 투숙동(投宿洞)에 있는데, 사촌 동생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효종 때 좌승지(左承旨)를 추증하였고, 강화도의 사람들이 ‘충렬서원(忠烈書院)’을 세워서 송시영과 이시직 · 김상용 등 강화에서 순절한 8인을 함께 제향하였다. 그밖에 회덕의 별사(別祠), 영동의 초강서원(草江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부인 전의이씨(全義李氏)는, 재상 이탁(李鐸)의 증손으로 증 사헌부 지평(持平) 이여(李勵)의 딸인데, 자녀는 3남 2녀를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