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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68년(세조14)∼1527년(중종22) = 60세]. 조선 중기 중종 때의 문신. 자는 서가(恕可)이다. 본관은 은진(恩津)이고, 주거지는 충청도 회덕(懷德)이다. 안동부사(安東府使) 송여해(宋汝諧)의 아들이며, 도승지 송기수(宋麒壽)의 아버지이다. 주계군(朱溪君) 이심원(李深源)의 문인이자 사위이고, 송시열(宋時烈)의 고조부 송세량(宋世良)의 형이다.
[중종 시대 활동]
1513년(중종8) 식년(式年)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46세였다. 승문원 정자(正字)에 보임되어 박사(博士)에 이르렀고,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승진하여 형조 · 예조의 좌랑(佐郞)으로 전임되었다가 승문원 교리(校理)로 승진하였다. 1520년(중종15) 한성부 판관(判官)으로 있다가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로 나갔다. 내직으로 들어와서 호조 정랑이 되었다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다시 경기도도사(京畿道都事)로 나갔다. 호조 · 병조의 정랑(正郞)을 거쳐서 사재감(司宰監)첨정(僉正)으로서 사헌부 장령(掌令)을 겸하게 되어, 재앙을 살피기 위하여 충청도에 나갔다가 돌아와서, 한성부 서윤(庶尹)이 되었다. 1523년(중종18) 사헌부 지평(持平)으로 있을 때 기우제관(祈雨祭官)이 단소(壇所)에서 활을 쏘는 놀이를 한 것을 조사하여 벌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 빌미가 되어 함안군수(咸安郡守)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사실은 요직(要職)에 있는 자가 사사로운 송사(訟事) 사건을 그에게 부탁하였으나, 그가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중앙정계에서 축출된 것이다. 조정에서 그의 어머니가 늙었다고 하여 광흥창(廣興倉)수(守)로 그대로 머물러 두었다가, 또다시 외임을 맡겨 가평군수(加平郡守)에 임명하였다. 관직에 있다가 모친상을 당하여 집상(執喪)하던 중 지나치게 몸이 수척해져서 1527년(중종22) 상중에 죽었는데, 향년이 60세였다.
[성품과 일화]
송세충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천성은 낙천적이고 단순하여 식구와 살림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경전(經傳)과 사서(史書)만을 힘써 탐독하였다. 남과 교제할 적에 조금도 한계를 두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친밀하게 따르고 사모하였다. 손님이 오면 반드시 술자리를 마련하여 즐거움을 다하였다. 친족들과 화목하게 지내면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었는데, 항상 부족한 것같이 생각하였다. 비록 그가 부리는 하인이라도 재앙을 당하거나 병이 나면 반드시 힘껏 도와주었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충청도 회덕현(懷德縣) 동쪽 식장산(食藏山)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주계군(朱溪君) 이심원(李深源)의 맏딸로 현숙하며 여자의 범절이 있었고, 1남 3녀를 낳았다. 아들 송기수(宋麒壽)가 과거에 급제하여 도승지(都承旨) · 참판 · 판서를 지내고 덕은군(德恩君)에 봉해졌다. 이황은 그의 후손이 번창한 것에 대해 “하늘이 선인(善人)에게는 그 몸을 도와주다가, 부족한 바가 있으면 반드시 그 후손을 번창하도록 보답한다는 뜻이 이 집에 있었던 것이로구나!”라고 찬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