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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30년(인조8)∼1709년(숙종35) = 80세]. 조선 후기 효종∼숙종 때 활동한 문신. 자는 도원(道源), 호는 제월당(霽月堂)이다. 본관은 은진(恩津)이고, 세거지는 충청도 회덕(懷德)이다. 아버지는 목사(牧使)송국전(宋國銓)이고, 어머니 순흥안씨(順興安氏)는 안경인(安敬仁)의 딸이다. 성균관 학유(學諭)송희원(宋希遠)의 손자이고 이조 판서 송상기(宋相琦)의 아버지이다. 동향 친척 송시열(宋時烈) · 송준길(宋浚吉)의 문인이다.
[효종∼현종 시대 활동]
1654년(효종5) 식년(式年)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보임되었다가, 예문관 검열(檢閱)이 되었고, 성균관 전적(典籍)을 거쳐, 사헌부 지평(持平) · 사간원 정언(正言)을 역임하였다.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 외방 수령을 자청하여 무장현감(茂長縣監)으로 나갔다가, 병조 정랑에 임명되었다. 1662년(현종3) 사헌부 지평을 역임하고, 용담현령(龍潭縣令)으로 나갔다. 1664년(현종5) 홍문록(弘文錄)에 선발되어 홍문관에 들어가서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에 임명되었으나, 용담(龍潭)에서 부임하러 상경하는 도중에, 남인 서필원(徐必遠)이 상소하여 그를 배척한다는 소문을 듣고 즉시 사직하고 고향 회덕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 뒤에 여러 차례 수찬(修撰) · 부교리(副校理) · 교리(校理) · 지평 · 정언 · 헌납(獻納) · 시강원 문학(文學) · 이조 좌랑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사간원 사간(司諫)에 임명되었는데, 1674년(현종15) 효종 왕비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張氏)의 <복상(服喪) 문제>가 일어나서, 남인의 기년설(朞年說)이 채택되고, 대공설(大功說)을 주장하던 노론의 송시열 · 송준길 등이 귀양을 가게 되자, 그는 상소하여 송시열과 송준길을 적극 변명하다가 파면당하였다.
[숙종 시대 활동]
1675년(숙종1) 서천군수(舒川郡守)로 나갔는데, 암행어사가 그 치적이 훌륭하다고 보고하니, 숙종이 표리(表裏) 1습을 내려 주었다. 1677년(숙종3) 사헌부 집의(執義)와 사간원 사간에 임명되어, 송시열과 송준길의 석방을 거듭 주장하다가 남인 집정 허적(許積) · 권대운(權大運)에 의하여 삭탈관직(削奪官職)되고 문외출송(門外出送)당하였다. 1678년(숙종4) 모친상을 당하고, 고향에서 상례를 끝마칠 무렵 1680년(숙종6) <경신출척(庚申黜陟)>이 일어나서 남인 정권이 무너지고 서인 정권이 들어섰는데, 그가 제일 먼저 서용(敍用)되어 사간원 사간으로 복직되었다. 이듬해 홍문관 수찬 · 성균관 사성(司成)에 임명되었고, 공조 참의 · 호조 참의를 거쳐 마침내 대사간(大司諫)으로 승진되었다. 1682년(숙종8) 동부승지로 발탁되었고, 예조 참의 · 이조 참의로 옮겼다가 승지(承旨)가 되었으며, 홍문관 부제학(副提學) ·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으로 전직하였다. 1685년(숙종11) 강양도관찰사(江襄道觀察使: 강원도관찰사)와 공홍도관찰사(公洪道觀察使: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가, 1688년(숙종14)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 이듬해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 병조 참판을 거쳐 다시 도승지에 임명되었다. 공조 참판 · 예조 참판으로 전직하여, 태조의 영정(影幀)을 모시고 전주(全州)로 갔다가 돌아오는 도중에, 1689년(숙종15)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서 남인이 집권하였다. 이때 서인들은 모두 축출되었는데, 송시열이 맨 먼저 화를 당하고, 그도 벼슬에서 쫓겨났다.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폐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도성을 나와 고향 회덕으로 돌아가서 학문을 닦고 후진을 가르쳤다. 1694년(숙종20) 인현왕후가 복위(復位)되자, 그를 맨 먼저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하고 빨리 상경하라고 재촉하였으나 그는 고향에 그대로 은거하였다. 그 뒤에 대사헌(大司憲), 대사간, 중추부 동지사, 예조 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699년(숙종25)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이 되었는데, 나이 70세로서 ‘세 조정을 거친 늙은 신하’라고 하여, 특별히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그 뒤에 중추부 지사, 의정부 우참찬, 예조 판서,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709년(숙종35) 나이 80세가 되었다고 하여 종1품하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진되고 돈녕부(敦寧府) 지사(知事)에 임명되었다. 1709년 6월 5일 노병으로 고향 회덕에서 죽었는데, 향년이 80세였다.
저서로는 『제월당집(霽月堂集)』이 있다. 글씨를 잘 썼는데, 특히 전서(篆書)와 주서(籒書)에 능하였다.
[성품과 일화]
송규렴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단정하고 묵중하며 화평하고 청아하였으므로, 집안의 행실이 항상 예절과 규모를 잘 갖추었다. 병환이 난 어머니를 성실한 마음으로 수십 년 동안 하루같이 모셨다. 여러 조카들을 자기의 소생이나 다름없이 사랑하였으나, 자녀들이 과실이 있을 경우에는 조금도 용서하지 않고 엄중히 꾸짖었다. 정사를 다스릴 적에는 자기 자신을 엄하게 단속하였으나 백성들을 너그럽게 용서해주고 사랑하였다. 그리고 정사를 의논할 적에는 자기 의견을 견지하면서도 주장이 과격하지도 않고 남의 의견을 맹종하지도 않았다. 이조에 있을 적에 조정의 의논이 당파에 의하여 엇갈렸으나, 인재의 선발을 공평하게 하여 당파의 조화를 이루려고 노력하였으며, 관아에서 물러나오면 문전이 조용할 정도로 사람들의 출입을 막았으므로 인사 청탁이 근절되었다. 그는 학문이 뛰어나서, 스승 송시열 · 송준길 등과 함께 동종(同宗) · 동향(同鄕)으로 회덕의 ‘삼송(三宋)’이라 일컬어졌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묘소는 충청도 공주(公州) 삼미천(三美川)의 언덕에 있는데, 부인과 나란히 묻혔다. 이재(李縡)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부인 안동김씨(安東金氏)는 중추부 동지사 김광찬(金光燦)의 딸이고,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손녀인데, 자녀는 2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송상기(宋相琦)는 이조 판서, 대제학을 지냈고, 차남 송상유(宋相維)는 부사(府使)를 지냈다. 충청도 회덕의 미호서원(美湖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