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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97년(선조30)∼1659년(효종10) = 63세]. 조선 중기 인조~현종 때 활동한 문신. 자는 택지(澤之), 호는 사우당(四友堂)이다. 본관은 은진(恩津)이고, 세거지는 충청도 회덕(懷德) 송촌(松村)이다. 생부는 송희명(宋希命)이고, 양부는 진사(進士) 송몽인(宋夢寅)이며 양모 여흥민씨(驪興閔氏)씨는 민수경(閔守慶)의 딸이다. 쌍청당(雙淸堂) 송유(宋愉)의 후손이고, 현종비(顯宗妃) 명성왕후(明聖王后)의 외조부이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부자의 문인이다.
[인조 시대 활동]
1624년(인조2)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正子)에 보임되었다가, 성균관 박사(博士)로 승진하였다. 1627년(인조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김장생이 호소사(號召使)가 되어 의병(義兵)을 일으켜 후금(後金) 군사와 싸우려고 호남과 호서 지방에 격문(檄文)을 보낼 때, 제자 송국택을 불러서 막하(幕下)의 참모(參謀)로 삼았다. 1629년(인조7) 추천을 받아 홍문록(弘文錄)에 선발되어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갔다. 1630년(인조8)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으나, 동료들에게 상회례(相會禮)를 거행하기로 약속하고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았으므로, 헌납 김광혁(金光爀)에게 탄핵당하여 함경도도사(咸慶道都事)로 좌천되었다. 1632년(인조10)에 비로소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가,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다. 그때 대사헌(大司憲) 김상헌(金尙憲)의 주장에 따라 인조의 생부 정원군(定遠君)을 원종(元宗)으로 추존하는 데 반대하다가, 인조의 배척을 받아 수성도찰방(輸城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 그 뒤에 문천군수(文川郡守)를 거쳐서,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되었다가 종묘서(宗廟署)영(令)으로 전임되었다.
1634년(인조12) 잠곡(潛谷) 김육(金堉)의 차남 김우명(金佑明)에게 딸을 시집보냈다. 그 사이에서 낳은 딸이 나중에 현종의 왕비인 명성왕후(明聖王后)가 되어, 김우명은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송국택의 딸은 덕은부부인(德恩府夫人)이 되었다. 1635년(인조13) 다시 사헌부 장령이 되었는데, 이듬해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인조가 황급히 남한산성으로 피난할 때 미처 호종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강화도(江華島)로 피난하였다. 1637년(인조15) 강화도가 함락될 때 민광훈(閔光勳)과 함께 원손(元孫: 소현세자 아들)을 모시고 성을 넘어 도망하여 마침내 교동(喬桐)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당진(唐津)으로 옮겨, 일행이 무사하였다. 그 공로로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되어 병조 참지에 임명되었고 형조 · 공조의 참의를 거쳐, 광주목사(光州牧使)로 나갔다. 1641년(인조19) 광주목사로 있을 때 탄일(誕日)을 진하(陳賀)하는 전문(箋文)에 청(淸)나라 연호(年號)를 쓰지 않았다고 파직당하였다. 1648년(인조26) 좌부승지(左副承旨)로 발탁되었다가, 곧 우승지(右承旨)에 임명되었다.
[효종-현종 시대 활동]
1650년 효종이 즉위할 때 승지(承旨)로 있었으나, 얼마 안 되어 전주부윤(全州府尹)에 임명되었는데, 생가(生家)의 아버지가 고령(高齡)이었으므로 은혜를 베풀어 줄 것을 상소하니, 효종이 통정대부 중추부 첨지사에 임명하였다. 1659년 현종이 즉위하자, 병조 참의에 임명되었다가, 호조 참의로 전임되었다. 그의 병이 위독해지자, 현종이 의원을 보내어 그 병을 치료하게 하였는데, 중전 김씨(명성왕후)의 외조부였으므로 특별히 은사를 베풀었던 것이다. 출사하다가 쓰러져서 1659년(효종10) 11월 15일 서울의 집에서 죽으니, 향년이 63세였다.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조정에서 애도의 뜻을 표하는 예절이 매우 융숭하였다.
저서로는 『사우당집(四友堂集)』이 있다.
[성품과 일화]
송국택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성품이 명랑하고 화평하여 평생 동안 남의 잘못을 말하지 않았다. 어버이에게 조석의 봉양을 극진히 하였고, 벼슬길에 나가서는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하여, 공주(公州) · 광주(光州) · 성천(成川) · 임천(林川)· 옥천(沃川) 등의 고을 수령을 자원하여 오랫동안 외방에 나가 있었다. 그는 평생 동안 지봉(芝峰) 이수광(李晬光)과 잠곡 김육을 매우 사모하고 존경하여 그들의 언행(言行)을 즐겨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였다. 이것은 양모 여흥민씨가 이수광의 생질녀였고, 그의 외동딸이 김육의 둘째 아들 김우명과 혼인하였기 때문이다.
[묘소와 제향]
시호는 효정(孝貞)이다. 묘소는 처음에 충청도 공주 소흘리(素屹里)에 반장(返葬)하였다가, 뒤에 공주 동쪽 50리 저교리(狙橋里)에 이장(移葬)하였다. 친척 후손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부인 진주강씨(晉州姜氏)는 장사랑(將仕郞)강치황(姜致璜)의 딸인데, 자녀는 4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송규광(宋奎光)은 사헌부 감찰(監察)을 지냈고, 외동딸은 국구 김우명과 혼인하여 명성왕후를 낳았으며 명성왕후는 숙종(肅宗)을 낳았다. 그는 죽은 뒤에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충청도 대전시 대덕구 회덕동의 정절서원(靖節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