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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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걸(白仁傑)

서지사항
항목명백인걸(白仁傑)
용어구분인명사전
분야정치·행정가
유형인물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총론]
[1497년(연산군3)~1579년(선조12) = 83세]. 조선 중기 중종~선조 때 활동한 학자 · 문신. 자는 사위(士偉), 호는 휴암(休菴)이다. 본관은 수원(水原)이고, 주거지는 서울과 파주이다. 아버지는 왕자 사부(王子師傅) 백익견(白益堅)이고, 어머니 단양우씨(丹陽禹氏)는 사직(司直) 우종은(禹從殷)의 딸이다. 조광조(趙光祖)와 김안국(金安國)의 문인이고, 송인수(宋麟壽) · 유희춘(柳希春) · 이이(李珥) · 성혼(成渾) 등과 교유하였다.

[중종 시대 활동]
정암(靜巖) 조광조를 존경하여, 그 집 옆에 집을 짓고 살면서 가르침을 받았다. 1519년(중종14)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서 조광조의 사림파(士林派)가 숙청당할 때 그의 나이가 23세였는데,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기 전이이었으므로 화(禍)를 면하였다. 그는 비분강개하여 금강산에 들어가서 한동안 수양하다가 돌아와서, 모재(慕齋) 김안국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간간이 태학(太學)에 나가서 이름난 유생들과 교유하였다. 1531년(중종26)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1537년(중종32)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41세였다. 훈구파(勳舊派)에서 그를 조광조의 제자라고 배척하여 성균관에 예속시켰다. 1537년(중종32) 예문관 검열(檢閱)로 있을 때 정청(政廳)에 나가 이조 인사 행정의 잘잘못을 점검하였다. 당시 이조에서 도목정사(都目政事)를 행하면 예문관 검열이 파견되어 인사 행정의 잘잘못을 평가하던 옛날 제도를 부활하였는데, 그가 이 일을 맡아 엄격하게 판정하였기에 이조에서 그를 매우 꺼렸다. 예조 좌랑으로 옮겼다가,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되어 소윤파의 정순붕(鄭順朋)과 최보한(崔輔漢)을 탄핵하였다.

1541년(중종36) 홍문록(弘文錄)에 19명의 신진 사류(士類)를 뽑았을 때, 그가 맨 첫째로 선발되었던 것을 보면, 사림파에서 가장 촉망을 받던 젊은 인재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서 전라도 남평현감(南平縣監)으로 자원해서 나갔다. 1543년(중종38) 사헌부 헌납(獻納)에 임명되었으나, 사헌부에서 그를 싫어하는 자들이 유임시키도록 상소하여 남평현감으로 유임되었다. 이때 그는 성실히 근무하였을 뿐만 아니라 특히 학당(學堂)을 세우고 학장(學長)을 두어 고을 자제들의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1544년(중종39) 전라도관찰사 송인수가 남평현감 백인걸의 선정(善政)을 보고하니, 중종이 승품(陞品)하라고 명하였다. 송인수와 백인걸은 사림파의 중진으로서 서로 절친한 친구였다.

[을사사화와 백인걸]
1544년 인종이 즉위하자 그 외삼촌 윤임(尹任)이 정권을 잡고, 사림파(士林派)의 인물을 많이 등용하였다. 백인걸도 청요직(淸要職)에 기용되어, 1545년(인조1)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가, 호조 정랑으로 옮겼는데, 춘추관 기주관(記注官)을 겸임하였다. 그 해 7월 명종이 즉위하자, 명종의 어머니 문정대비(文定大妃)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게 되었다. 명종의 외삼촌 윤원형(尹元衡)은 중추부사 정순붕 · 호조 판서 임백령(林百齡) · 병조 판서 이기(李芑) · 공조 판서 허자(許磁) 등과 결탁하여 윤임 일파를 제거하고자 하였다. 다음 달인 8월 문정대비가 인종의 외숙 윤임과 좌의정 유관(柳灌) · 이조 판서 유인숙(柳仁淑) 3인에게 죄를 주라는 내용의 밀지(密旨)를 윤원형에게 내렸다. 윤원형은 대비의 밀지를 대사헌 민제인(閔齊仁) · 대사간(大司諫)김광준(金光準)에게 전해 주면서 대간에서 그들을 탄핵하도록 하였다. 윤원형 일파는 당시 사헌부 헌납(獻納)이었던 백인걸이 대간에서 가장 강력한 반대를 하리라고 생각하고 백인걸의 오랜 친구인 허자를 통해 그를 설득하였으나 그는 거절하였다. 허자가 그의 노모를 언급하면서 화를 내었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병으로 사직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백인걸은 “일을 하다가 어려움을 피하는 짓을 나는 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사헌부 집의 송희규(宋希奎)가 대비의 밀지가 내려진 것을 동료 대간에게 전하자, 백인걸은 밀지가 잘못되었다는 점을 자신이 논박할 것이라 하였다. 대비의 밀지를 논의하기 위하여 사헌부 · 사간원 양사(兩司)가 중학(中學)에 모였을 때, 집의 송희규 · 장령 정희등(鄭希登) 등과 사간원 사간 박광좌(朴光佐) · 사헌부 헌납 백인걸 등이 밀지만으로 대신을 탄핵할 수 없다고 강하게 반대하였고 나라를 위해서 윤원형 일파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윤원형 일파는 의도대로 되지 않자 다음날 충순당(忠順堂)에서 중신회의를 열었다. 여기서 정순붕과 이기 등이 하관(下官)의 반대로 밀지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한 대사헌과 대사간에게 죄 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이언적은 사림(士林)에게 화(禍)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이를 반대하였고, 백인걸은 대비의 밀지가 조정의 논의를 거치지 않은 채 윤원형에 의해서 일이 추진되는 것, 민제인과 김광준을 비롯하여 양사의 관원들이 언관의 책임을 다하지 않고 눈치만 보는 것 등을 논박하였다.

화가 난 문정대비는 윤임은 귀양보내고, 유관과 유인숙은 파직시켰다가 다시 귀양보냈다. 윤임 · 유관 · 유인숙 3인은 인종의 장례도 치루기 전에 처형당하였고, 대윤파의 정희등 · 나숙(羅淑) · 박광우(朴光佑) 등 10여 명은 죽음을 당하였다. 명종은 백인걸을 파직한 다음 의금부에 가두고 문죄하도록 하였으며, 송희규 · 박광좌 이하의 관원도 아울러 파직하도록 하였다가, 언관(言官)을 모두 죄를 주기 어려워 백인걸만 구속하고, 집의 송희규 이하는 그 본직을 교체하였다. 이때 북창(北窓) 정염(鄭*)이 아버지 정순붕에게 백인걸 같은 충직한 사람을 해치는 것은 만세에 죄를 짓는 것이라 말하고 만류하자, 정순붕이 그를 구원하였고, 최보한도 적극적으로 백인걸을 구명하였다. 문정대비의 노여움이 풀려 종편(從便)하게 되자 그는 경기도 파주(坡州)에서 조용히 지냈다. 이곳에는 우계(牛溪) 성혼의 서당이 있어서, 율곡(栗谷) 이이와도 자주 만나 학문적 교유를 하였다.

그러나 1547년(명종2) 정언각(鄭彦慤)이 양재역(良才驛)에 나붙은 벽서(壁書)를 고변(告變)하고, <을사사화>의 관련자들에게 혐의를 씌웠다. 그리하여 송인수 등은 죽음을 당하고 백인걸은 함경도 안변(安邊)으로 유배되었다. 얼마 안 되어 모친상을 당하였으나, 그는 유배지에서 분상(奔喪)하지 못하였다. 5년 후에 대사(大赦)를 만나 1551년(명종6) 유배지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집안이 평소 가난하였는데, 이때 더욱 생활이 어려워졌는데도, 『태극도설(太極圖說)』등 정주학(程朱學)의 이론을 깊이 연구하였다.

[명종 말기∼선조 초기 활동]
1565년(명종20) 문정대비가 죽고 명종이 친정(親政)하자, 백인걸의 직첩을 돌려주고 승문원 교리(校理)에 임명하였다. 1566년(명종21) 사도시(司䆃寺) 첨정(僉正)을 거쳐 선공감(繕工監) 부정(副正)이 되었고, 1567년(명종22) 양주목사(楊州牧使)로 나갔다가, 홍문관 부교리(副校理)에 임명되었다. 양주목사로 있을 때 공납(貢納)의 폐단을 개혁하는 등 선정을 베풀어 고을 사람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

1567년(선조즉위)에 그는 홍문관 교리(校理)에 임명되었는데, 그때 나이가 71세였다. 1568년(선조1) 직제학(直提學)기대승(奇大升)이 중종 · 명종 때의 <사화(士禍)>에서 살아남은 사림파를 과감히 발탁할 것을 주장하였다. 새로운 개혁 정치를 모색하던 선조는 이 주장을 받아들여 백인걸 등을 발탁하였다. 백인걸은 홍문관 직제학을 거쳐 승지(承旨)가 되었고, 이조 참판으로 옮겼다가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선조 즉위 직후 수렴청정하려던 인순왕후에게, 여주가 국정에 오래도록 관여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진언을 하였다. 인순왕후는 선조가 20세가 될 때까지 수렴청정하고 싶어 하였으나, 문정대비의 수렴청정으로 남편 명종이 평생 자유롭게 정치를 하지 못하였던 것을 생각하고, 바로 수렴청정을 거두었다. 또 백인걸은 인순왕후의 동생 심의겸(沈義謙)이 사림파의 인사들과 교유하는 것을 경계하면서, 외척(外戚)이 정사에 관여하고 세력을 키우는 것에 대해 견제하였다. 선조가 아버지 덕흥군(德興君)을 추존하려고 하자 다른 신하들은 반대하였으나 그는 선조의 입장을 두둔하였다.

1568년(선조1) 대간(臺諫)에서 그를 탄핵하자, 백인걸은 병을 핑계로 파주로 돌아갔다. 조정에서 공조 참의에 임명하고, 다시 대사간으로 임명하였으나, 그는 병을 칭탁하며 부임하지 않았다. 1569년(선조2) 대사헌에 임명되었는데, 백인걸이 세 번이나 글을 올려 사양하였으나 선조가 몸소 간곡한 글을 지어서 보내고 계속 소명(召命)하였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배명(拜命)하였다. 1570년(선조3) 중추부 동지사를 거쳐 병조 참판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백인걸이 상소하기를, “을사년과 기유년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신원(伸寃)하고, 조광조(趙光祖)를 문묘(文廟)에 종사하며, 이황(李滉)을 조정에 초치하소서.” 하면서, 본인은 치사(致仕)하고 시골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병조 참판에서 공조 참판으로 옮기고, 경연관(經筵官)과 의금부사(義禁府事)를 겸임하도록 하였다.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1571년(선조4) 대사헌 벼슬을 그만두고 파주로 돌아갔다. 선조는 가끔 파주의 백인걸에게 궁중의 음식물을 보내고 문안하였다.

1576년(선조9) 의주목사(義州牧使) 곽월(郭越)이 백인걸은 사림에 화를 끼쳤다고 논박하자, 선조가 곽월을 체포하여 국문하였다. 1578년(선조11)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에 임명되었다가, 좌참찬(左參贊)으로 옮겼다. 『문소만록(聞韶漫錄)』 에 의하면, <을사사화>에서 살아남은 사림파 중에서 선조 때 3품 당상관에 오른 사람은 모두 9명인데, 그 중에서 삼재(三宰; 좌참찬)까지 승진한 사람은 백인걸 한 사람뿐이었다고 한다. 1579년(선조12) 중추부 지사에 임명되었다. 훈구 세력과 맞서 사림파의 명맥을 이어온 백인걸은 젊은 사림파 인재들의 동서(東西) 분당(分黨)을 보고 크게 가슴 아파하였다. 그는 선조에게 동인과 서인의 주장을 조정하여 정국을 안정시키도록 청하는 글을 올렸다. 백인걸이 초안을 쓰고 율곡 이이가 윤문하였기 때문에, 동인들은 그 글이 서인의 영수 이이가 지은 글이라고 공격하여, 오히려 당쟁(黨爭)이 격화되었다. 1579년(선조12) 9월 29일 서울의 집에서 죽으니, 향년이 83세였다. 나이 70세가 넘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또 청백리에 뽑혔다.

저서로는 『휴암집(休菴集)』이 남아 있다.

[성품과 일화]
백인걸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천성이 고매(高邁)하고 성격이 소탈하였으며 비분강개하는 기개와 절의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도학(道學)에 뜻을 두고 현인(賢人)이 되기를 희망하였다. 조정에 진출한 다음에는 더욱 자신을 연마하여 비록 폐척(廢斥)을 당하더라도 그 뜻을 꺾지 않았다. 그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어머니의 뜻을 한 번도 거스르지 않았으며, 형을 마치 엄격한 아버지처럼 섬겼다. 그의 집은 몹시 가난하여 어머니가 밤새도록 길쌈을 하였는데, 그는 옆에서 어머니를 모시면서, 반드시 어머니가 먼저 잠든 다음에야 자기도 잠들었다. 어머니가 어린 아이가 잠을 자지 않는 것을 가엾게 여겨, 언제나 등잔을 감추어 두고 잠든 체하다가, 어린 아들이 잠들고 나면 일어나서 길쌈을 하였다고 한다. 어린아이였을 때 그는 구용(九容: 아홉 가지 몸가짐)과 구사(九思: 아홉 가지 마음가짐)를 좌우명(座右銘)으로 써 붙여놓고, 매일 이것을 읽으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눈을 감고 수양하였다. 이렇게 석 달을 지냈는데, 친구들이 찾아와서 그를 보고 깜짝 놀라면서, “네 모습과 말하는 투가 전보다 많이 달라졌다.” 하였다. 그 뒤에 조금 자라서 스스로 스승을 선택하여 학문을 배웠는데, 오로지 조광조만을 섬겼다. 심지어 조광조 집의 곁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가까이 살면서, 한마디 말과 한 가지 행동도 오직 스승만을 본받았다. 그는 진유(眞儒) 조광조를 지성으로 섬기고 마음으로 심취해서 죽을 때까지 우러러 받들었다. 조광조의 가르침에서 그 대도(大道)의 요체를 체득하여 소견(所見)은 더욱 높아지고 소양(所養)은 더욱 바르게 되어서, 만년(晩年)에 자기의 덕기(德器)를 완성하였다. 그는 마음이 너그럽고 평탄하여 남과 한계를 두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과 같이 있으면서 그 폐부(肺腑)를 뚫어보았고, 남의 선행을 들으면 지성으로 칭찬하고 흠모하였다. 아무리 미천하거나 나이 어린 사람이라도 진실로 자신의 허물을 말하면 반드시 기쁘게 받아들여 즉석에서 허물을 고쳤다. 평소에 즐기고 좋아하는 것이 없어 입는 것과 먹는 것에는 소홀하였고, 먼지가 방에 가득 쌓여도 쓸지 않았다. 늙어서도 오직 성리학만을 탐독하여 낮에는 글을 읽고 밤에는 궁리하여 깨닫는 바가 있으면 항상 종이에 적어 두었다. 친구들이 찾아오면 즐겁게 학문을 강론하고 의문 나는 점을 토론하였다. 그는 성명(性命)에 관한 책이 아니면 읽지를 않았다.

백인걸은 성혼 · 이이와 만나면 학문을 논하였는데, 늙어서도 그만두지 않았다. 백인걸은 성혼 · 이이를 크게 쓸 만한 인물이라고 선조에게 천거하였다. 그러나 성혼은 “백공(白公)의 재주를 바둑 두는 것에 비유하면, 때로는 아주 잘 두어서 국수(國手)와 대적할 수 있으나, 때로는 패착(敗著: 자충수)을 두기도 하니, 의지하고 믿을 만한 재주가 못된다.”고 평하였는데, 이것은 이이 · 성혼의 학문과 비교하여 모자란다는 뜻이다. 그러나 백인걸은 학문을 실천에 옮기는 유학자였으므로, 기개(氣槪)가 있었고 직언(直言)하기를 좋아하였으며, 생활이 매우 검소하였다. 관직에 있을 때에 녹봉미와 마초값[騶直]을 모두 도봉서원(道峰書院)에 보낸 후, 왕래하고 유숙하면서 친구들과 만나서 회포를 풀었고, 또 소득이 있으면 번번이 친족에게 나누어 주었으므로, 그가 벼슬에서 물러났을 때 조석(朝夕)의 끼니를 때울 양식도 없었다. 경기도관찰사 윤근수(尹根壽)가 장계로써 이 사실을 보고하자, 선조가 두 번이나 미두(米豆)를 백인걸에게 보내주었다. 그는 집에 거처할 때에 항상 가난하고 언제나 검소하였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처음에 충숙(忠肅)이었으나, 뒤에 문경(文敬)으로 고쳤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 적석리(積石里)에 있는데,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 파주의 파산서원(坡山書院), 남평의 봉산서원(蓬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첫째 부인 평택임씨(平澤林氏)는 1남을 두었는데, 장남 백유공(白惟恭)이다. 둘째 부인 순흥안씨(順興安氏)는 만호(萬戶) 안찬(安璨)의 딸로 자녀는 2남 5녀를 두었다. 차남 백유항(白惟恒)은 현령(縣令)을 지냈고, 3남 백유함(白惟咸)은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承旨)를 지냈다. 넷째 딸은 종실의 서자인 의령감(義寧監) 이윤조(李胤祖)의 처가 되었다. 『기축록(己丑錄)』에 의하면, 딸이 이윤조와 혼인할 때 백인걸의 조카인 백유양(白惟讓)이 반대하였는데, 이것을 알게 된 이윤조의 아들 이춘영(李春英)이 나쁜 감정을 품고, 1589년(선조22) <기축옥사(己丑獄死)> 때 백유양 부자를 모함하여, 큰 물의를 일으켰다고 한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인종실록(仁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송자대전(宋子大全)』
■ 『계갑일록(癸甲日錄)』
■ 『고봉집(高峯集)』
■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 『기축록(己丑錄)』
■ 『퇴계집(退溪集)』
■ 『동각잡기(東閣雜記)』
■ 『문소만록(聞韶漫錄)』
■ 『미수기언(眉叟記言)』
■ 『백사집(白沙集)』
■ 『부계기문(涪溪記聞)』
■ 『사계전서(沙溪全書)』
■ 『상촌집(象村集)』
■ 『서애집(西厓集)』
■ 『석담일기(石潭日記)』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우계집(牛溪集)』
■ 『월정만필(月汀漫筆)』
■ 『율곡전서(栗谷全書)』
■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
■ 『임하필기(林下筆記)』
■ 『잠곡유고(潛谷遺稿)』
■ 『청음집(淸陰集)』
■ 『택당집(澤堂集)』

■ [집필자] 이기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