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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46년(명종1)~1618년(광해군10) = 73세]. 조선 중기 선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중열(仲說)이고, 호는 당산(棠山)이다. 본관은 수원(水原)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참찬(參贊) 백인걸(白人傑)이고, 어머니 순흥안씨(順興安氏)는 만호(萬戶) 안찬(安璨)의 딸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70년(선조3)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음보(蔭補)로 순릉(順陵)참봉(參奉)을 지냈다. 1576년(선조9)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1세였다. 승정원 주서(注書)에 보임되었고, 홍문록(弘文錄)에 선발되어 홍문관 정자(正字) · 박사(博士) · 부수찬(副修撰)으로 승진하였는데, 항상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병조 좌랑을 거쳐 병조 정랑으로 승진하였고, 1583년(선조16) 홍문관 수찬(修撰)에 임명되었다가, 이조 좌랑을 거쳐 이듬해 이조 정랑에 발탁되었다. 이때 서인(西人)의 영수 이이(李珥)가 이조 판서로 있었는데, 아버지 백인걸의 친구인 이이를 모시고 인사 행정을 공평하게 하여 당쟁을 피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10만 양병(養兵)’을 주장하던 이이가 돌아가자, 그는 동인(東人)의 공격을 피하여 벼슬을 사임하고 용안(龍安: 함열)의 농장으로 내려가서 은거하면서, 6년 동안 도솔산(兜率山) 백운암(白雲庵)에서 후학들을 가르쳤다.
1589년(선조22)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이 일어나서 서인 정철(鄭澈)이 정권을 잡자, 예조 정랑으로 복직되었다. 사헌부 헌납(獻納)에 임명되어, 좌의정 정철을 도와서 정여립 등과 가까운 동인들을 공격하여, 동인을 제거하는 데 앞장섰다. 이때 동인 1천여 명이 죽거나 귀양 갔다. 그가 이발(李潑) · 이길(李洁) · 김우옹(金宇顒) 등 동인을 탄핵하자, 선조는 “백인걸은 아들다운 아들을 두었다.”고 하였다. 다시 이조 정랑이 되었다가, 의정부의 검상(檢詳) · 사인(舍人)으로 전직되었다. 1591년(선조24) 왕세자 책봉 문제로 서인 정철이 동인의 공격을 받고 평안도 강계(江界)로 유배되자, 그도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고 함경도 경성(鏡城)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경흥(慶興)으로 이배(移配)되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유배지에서 풀려나 의주(義州)로 가서 선조를 호종(扈從)하니, 예문관 직제학(直提學)에 임명되었다. 이때 명(明)나라 군사들의 군량미를 조달하라는 명령을 받고, 윤승훈(尹承勳) 등과 함께 여러 고을에서 군량미 2만 석을 거두어 명나라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의 군대에 공급하였고, 또 명나라 군문(軍門)으로 가서 유정(劉綎)의 군대가 조선에 더 머물도록 청하였다. 이후 성균관 사성(司成)에 임명되어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을 겸임하였다. 1593년(선조26) 홍문관 직제학으로 있을 때, 황정욱(黃廷彧)을 탄핵하였다. 황정욱은 왜란 중에 함경도 회령(會寧)에서 순화군(順和君) 등 두 왕자를 모시고 있다가 왜군에게 잡혀서 선조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글을 썼다. 1594년(선조27)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었고,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승진하였다가, 황주목사(黃州牧使)로 나갔다. 1596년(선조29) 조선의 실정을 설명하기 위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해동기략 사건]
1597년(선조30) 호군(護軍)에 임명되었는데, 그때 명나라 병부(兵部) 주사(主事) 정응태(丁應泰)가 명나라의 파병 군사를 점검하기 위하여 조선에 왔으므로, 그 접반사(接伴使)가 되어 그를 접대하였다. 당시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 명나라에서 파견한 군사의 규모가 10만 명 이상 20만 명 이하로 추정되는데, 기록마다 병력 규모가 각기 다르다. 일본의 왜군이 수전(水戰)에 뛰어났기 때문에 명나라 군사에는 월남 · 태국 등의 남만군(南蠻軍)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또 일본의 동원한 군사 규모도 9부대 15만 명 정도였다. <정유재란>은 그야말로 국제 전쟁으로 조선에 들어온 외국 군사가 총 30여 만 명이 넘었다. 명나라 군사는 남군과 북군 사이에 지휘 계통의 혼란이 일어나서 병부의 실무 책임자가 조선에 와서 조정을 하였는데, 경리(經理) 양호(楊鎬)가 그 명령을 따르지 않았으므로 명나라 군문과 병부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다. 이때 명나라 군사가 왜군과 싸우지 않고 있었으므로, 조선에서는 경리 양호를 변호하고, 왜군과의 싸움을 독촉하였다. 병부 주사 정응태는 조선이 경리 양호를 변론(辯論)하는 것에 불만을 드러내고, 『해동기략(海東記略)』에 기록된 사실을 날조하여 명나라 조정에 보고하여 명나라에서 조선 정부를 크게 힐책하였다.
『해동기략』은 세종 때 신숙주(申叔舟)가 지은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 말하는데, 당시 우리나라 민간에 드물었던 일본 지리역사 소개서였다. 병부 주사 정응태가 정주(定州)에 머물 때 그의 하인이 시장에서 사들인 물건들을 종이로 싸다가, 그 종이 한두 장에 기록된 우리나라 왕들의 시호 ‘조(祖) · 종(宗)’과 일본 연호를 발견하였는데, 이는 『해동제국기』의 글에 나오는 일반적 단순한 표현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문제로 삼아서, 조선에서 중국의 ‘조종법(祖宗法)’을 마음대로 시행할 뿐만 아니라, 중국 연호 대신에 일본 연호를 쓴다고 무고하였다. ‘조종법’은 그 임금이 죽고 난 다음에 종묘(宗廟)의 각 실(室)에 붙이는 묘호(廟號) 곧 임금의 시호(諡號)를 정하는 제도를 일컫는 것이다.
당시 이이첨(李爾瞻) 등 북인 일파는 이것을 당론(黨論)으로 하여 서인을 공격하는 빌미로 삼았다. 1598년(선조31) 이이첨 일파는 정응태 사건에 대한 죄를 당시 접반사였던 백유함의 탓으로 돌려 그를 중죄인으로 몰았고, 사간원과 사헌부의 양사(兩司)에서는 그를 합동으로 탄핵하였다. 마침내 의정부 · 사헌부 · 의금부의 3기관에서 합동으로 중죄인을 심문하는 삼성추국(三省推鞫)이 열렸는데, 그 위관(委官: 재판장)에 우의정 이항복(李恒福)이 임명되었다. 대개 삼성에서 합동으로 추국하는 제도는 모반(謀反)대역(大逆)과 같은 중대한 죄인을 심문하기 위하여 마련되는 것인데, 중죄인은 거의 예외 없이 능지처참(陵遲處斬)의 중형을 받았다. 그러나 이항복이 선조에게 백유함의 억울한 정상을 호소하여, 선조가 특별히 용서해 주고 전라도 부안(扶安)으로 유배하였다. 서인들이 그를 꾸준히 구명하였으므로, 1602년(선조35) 직첩(職帖)을 돌려받고 유배지에서 풀려나 종편(從便)하게 되었다. 그는 용안(龍安)의 옛 집으로 돌아와서 15년 동안 칩거하였다. 그 사이에 사헌부에서 두 차례나 그 직첩을 환수하도록 상소하여, 1607년(선조40) 직첩을 회수 당하였다. 1617년(광해군9) 개성(開城)으로 옮겼는데, 양주(楊州)의 선영이 가깝기 때문이었다. 1618년(광해군10) 정월 개성의 우사(寓舍)에서 병으로 죽으니, 향년이 73세였다.
[성품과 일화]
백유함은 천성이 돈후(敦厚)하고, 성격이 확고하였으며 겉으로 꾸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일이 있으면 과감하게 처리하고 주저하지 않았다고 한다. 관직을 떠나서 20여 년 동안 귀양살이 하면서 몸소 농사를 짓거나 혹은 물고기를 잡아서 생계를 이어갔는데, 비록 거친 잡곡밥과 채소국을 먹고 살면서 보통 사람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어려운 생활을 하였으나, 마음만은 항상 편안하고 여유로웠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평생 당쟁에 휘말려 그 생애가 매우 불우하였다.
한편, 『부계기문(涪溪記聞)』에는 1589년(선조22) <정여립의 옥사>를 다스릴 때, 김빙(金憑)을 백유함이 무고한 일화가 있다. 정여립은 전라도 진안 죽도에서 자살하였는데, 조정에서는 그 시체를 가져다가 군기시 앞에서 육시(戮屍)하였다. 마침 김빙이 눈병이 걸려 눈물을 흘렸는데, 백유함이 그것을 보고 그가 정여립의 죽음을 슬퍼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하여 죄에 얽어서 그를 잡아다가 죽였다. 이때부터 조야(朝野)의 사람들이 백유함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하여 아무도 그를 바로보지 못하고 눈을 피하였다고 한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마전(麻田) 화진(禾津)의 언덕에 있는데, 부인과 합장되었다. 친구의 아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부인 경주김씨(慶州金氏)는 현감(縣監) 김굉(金鍧)의 딸인데, 자녀는 5남 1녀를 두었다. 차남 백선민(白善民)은 종친부 전부(典簿)를 지냈고, 3남 백신민(白信民)은 의빈부(儀賓府)도사(都事)를 지냈으며 4남 백현민(白賢民)은 무과에 급제하여 갑산부사(甲山府使)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