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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339년(충숙왕복위8)∼1408년(태종8) = 70세]. 고려 공민왕∼조선 태종 때 활동한 문신. 조선 태종비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의 아버지. 자는 중회(仲晦), 호는 어은(漁隱)이다. 본관은 여흥(驪興)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여흥군(驪興君) 민변(閔抃)이고, 어머니 허씨(許氏)는 고려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 찬성사(贊成事)허백(許伯)의 딸이다. 고려 밀직사(密直司) 판사(判事)민적(閔頔)의 손자이고, 조선 세종의 외조부이다.
[고려 말기의 활동]
1357면(공민왕6)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국자감(國子監) 직학(直學)에 임명되었고, 1362년(공민왕11)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을 거쳐, 이듬해 통례문(通禮門) 지후(祗候)에 임명되었다. 1366년(공민왕15) 전리(典理) 좌랑(佐郞)으로 옮겼고, 1371년(공민왕20) 예부(禮部) 직랑(直郞)으로 승진하였다. 1372년(공민왕21) 전리(典理) 정랑(正郞)에 임명되어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고, 이듬해 성균관 사예(司藝)로 발탁되었다.
1375년(우왕1) 전의시(典儀寺) 총랑(摠郞)으로 옮겼다가, 성균관 사성(司成)에 임명되었다. 1381년(우왕7) 43세의 나이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이듬해 전교시(典校寺) 판사(判事)에 임명되었다. 1387년(우왕13) 춘주지사(春州知事)로 나가서는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이듬해에 소부시(小府寺) 판사를 거쳐 예문관 제학(提學)에 임명되었고, 전공(典工) 판서(判書)로 옮겼다가, 예의(禮儀) 판서에 임명되어 춘추관 동지사 · 상호군(上護軍)을 겸임하였다.
1389년(창왕1) 판도(版圖) 판서에 임명되었다가 전리(典理) 판서로 옮겼으며 이어 개성윤(開城尹) · 밀직사 상의사(商議事)에 임명되어 예의(禮儀) 판서를 겸임하였다. 1390년(공양왕1) 밀직사 첨서사(僉書事)에 임명되어,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겸임하였다. 고려가 멸망하던 해인 1392년(공양왕4) 개성을 떠나 한양윤(漢陽尹)으로 나갔다.
[태조 시대 활동]
1392년(태조즉위) 조선이 개국하자,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 태학사(太學士)에 임명되었는데, 그때 새로운 왕조에서 처음으로 문묘(文廟)에 석전제(釋奠祭)를 지냈다. 1394년(태조3)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임명되어 도평의사사 동판사(同判使) · 수문전(修文殿) 학사(學士)를 겸임하였고, 하정사(賀正使)에 임명되어 중추원 부사 유원지(柳源之)와 함께 당시 명(明)나라 서울 남경(南京)에 가서 신년을 하례하였다. 귀국 후 삼사(三司) 우복야(右僕射)에 임명되어, 보문각(寶文閣) 대제학(大提學)을 겸임하였다. 그때 태조가 수도를 한양(漢陽)으로 정하고, 성곽을 쌓고 궁실을 지으면서, 문묘와 학궁(學宮)을 수도의 동북쪽 모퉁이에 세웠다. 민제가 그 공사를 주관하였는데, 1398년(태조7)에 성균관(成均館)과 문묘가 완성되었다.(『임하필기(林下筆記)』 권24)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사위 정안대군(靖安大君) 이방원(李芳遠)이 실권을 잡자, 정1품하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특진(特進)되어 여흥백(驪興伯)에 봉해졌고, 예조(禮曹) 영사(領事)에 임명되어 수문전 태학사를 겸임하였다. 그는 젊어서부터 학문에 조예가 깊고 예(禮)를 잘 안다고 하여 태학(太學)의 관직을 도맡고, 예조를 겸직하였다. 또 정도전(鄭道傳) · 조준(趙浚)과 함께 『경제육전(經濟六典)』을 편찬하면서, 국가의 크고 작은 예절과 법도를 상세히 규정하였다.
[정종∼태종 시대 활동]
1399년(정종1) 태조가 물러나고 정종이 즉위하자, 삼사 판사에 임명되어 경제적 실권을 장악하고 사위 이방원을 도왔다. <제2차 왕자의 난>으로 1400년(정종2) 이방원이 세자(世子)에 책립되자, 그 둘째 딸이 정빈(貞嬪)으로 책봉되었고, 그도 ‘수충 보조공신(輸忠補祚功臣)’에 책훈되고, 문하 우정승(右政丞) · 도평의사사 병조 판사에 임명되어 군권을 장악하였다. 정종 때 태조 이성계는 고향 함흥(咸興)으로 돌아가 은거하였는데, 좌정승 성석린(成石璘)과 함께 함흥차사(咸興差使)를 계속 보내어 이성계를 설득하였다. 마침내 이성계를 서울로 맞이하게 되었는데, 세자 이방원은 덕수궁(德壽宮)에서 이성계에게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바치며 존호(尊號)를 ‘계운 신무 태상왕(啓運神武太上王)’이라고 올리고, 헌수(獻壽)하였다. 태상왕 이성계는 좌정승 성석린과 우정승 민제, 삼군부 판사 하윤(河崙)에게 각각 내구마(內廐馬)를 1필씩 하사하였다. 그는 이성계와 이방원 사이를 화해시키려고 노력하여, 공신의 칭호가 ‘동덕 좌명공신(同德佐命功臣)’으로 바뀌었다. 또 좌정승(左政丞)으로 승진되자 그는 군국대사를 완전히 장악하여 사위 이방원이 왕이 되도록 뒷받침하였다. 1401년 정종의 선위를 받아 이방원이 즉위하자, 그의 딸은 정비(靜妃: 원경왕후)로 책봉되었다. 그는 ‘순충동덕 보조공신(純忠同德補祚功臣)’이란 공신 칭호를 받고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에 봉해졌다. 이후에 그는 국구(國舅)로서 관직에서 물러나 집에서 바둑이나 두며 한가롭게 지냈다.
[외척의 발호 억제와 멸문의 비극]
태종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궁중에서는 태종과 원경왕후(元敬王后: 정비) 사이에 궁녀의 빈잉(嬪媵) 문제로 불화가 일어나더니, 그 갈등이 점차 커졌다. 1402년(태종2) 궁녀김씨(宮女金氏: 효빈김씨)가 경녕군(敬寧君) 이비(李裶)를 낳자, 원경왕후가 질투하여 모자를 내쫓아 혹한에 그대로 내버려둔 적이 있는데, 이것을 <참고(慘苦) 사건>이라고 한다. 이 사건은 후일 사실을 알게 된 태종이 대간을 시켜서 민무휼(閔無恤) 형제를 몰아서 죽이는 빌미가 되었다. 당시 세자 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가 자주 일탈(逸脫)된 행동을 하여 물의를 일으켰기 때문에, 태종의 눈 밖에 나서 그의 세자 자리가 위태로워졌다. 불안을 느낀 민제의 두 아들 민무구(閔無咎)와 민무질(閔無疾)은 누이 원경왕후와 세자 양녕대군을 비호하다가 태종의 미움을 받았다. 1406년(태종6) 태종은 세자 양녕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하면서 세자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민제는 하륜과 조영무(趙英茂) · 이숙번(李叔蕃) 등과 함께 선양이 옳지 않다고 적극 만류하였다. 또 양위 선언에 태종의 숨은 의도가 있을 것이라 보고 아들 민무구 · 민무질에게 언행을 조심하도록 거듭 경계하였다. 그러나 1407년(태종7) 세자의 정혼(定婚) 문제로 인하여 <민무구 형제의 옥사(獄事)>가 일어났고, 민무구 형제는 대역죄인(大逆罪人)으로 몰려서 연안(延安)으로 귀양을 갔다. 4개월 후 궁중의 원경왕후가 태종의 금령(禁令)에도 불구하고, 친정의 아버지 민제와 연락을 주고받다가 그 사실이 밝혀지는 바람에 부녀가 더욱 곤경에 빠졌다.
1408년(태종8) 민제가 병상에 누워서 병이 위독해지자, 태종은 민무구 형제를 귀양에서 풀어 부자가 만날 수 있도록 하여 주었고, 태종도 직접 장인에게 병문안을 갔다. 사흘이 지나서 1408년 9월 15일 민제는 노병으로 죽었는데, 향년이 70세였다. 태종이 슬퍼하고 친히 상가에 찾아가서 치제(致祭)하였으나, 곧 민무구 형제를 체포하여 제주도로 귀양보냈다. 1410년(태종10) <이무(李茂)의 난언(亂言)> 사건이 일어나자, 태종은 민무구 형제를 이에 연루시켜서 이무와 함께 처형하였다. 1415년(태종15) 세자 양녕대군이 민무휼 · 민무회(閔無悔) 형제를 고발하여, 그들의 불충한 언행이 사실로 밝혀지자, 1416년(태종16) 민무휼 형제도 유배지에서 자결하였다. 이리하여 민제의 아들 4형제는 사위 태종에 의하여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달리 말하면 태종이 외척의 발호를 막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외척을 제거하였던 것인데, 그 결과 조선 중기까지 외척의 발호를 막을 수 있었다.
[성품과 일화]
그는 성품이 온화하고 인자하며 청렴하고 검소하여 화려하고 사치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경사(經史)에 밝았는데, 특히 역사(歷史)에 능하였으며, 시(詩)에 대한 평론도 잘 하였다. 반면에 이단(異端)과 음사(淫祀)를 싫어하여 강력히 배척하였는데, 막대기를 든 노복(奴僕)이 개를 시켜서 중과 무당을 쫓는 모습과 약(藥)으로 사람과 동물을 구제하는 모습을 화공(畫工)으로 하여금 벽에 그리게 해놓고 불화(佛畵) 대신에 이것을 보았을 정도였다. 그는 아들 민무구 · 민무질 등에게 “너희들은 교만이 가득 차 있다. 고치지 않으면 반드시 망할 것이다.” 라고 항상 훈계하였다.
그의 문하생으로 이지직(李之直) · 전가식(田可植) · 조서(趙敍) · 이공의(李公義) · 옥고(玉沽) 등이 있다. 1402년(태종2) 그가 제자 이지직 · 전가식 등을 벼슬에 추천하였는데, 인사에 사정(私情)을 둔다고 하여, 태종이 추천된 사람들을 모두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었다. 그 뒤부터 그는 문하생들을 어느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태종도 잠저(潛邸)에 있을 때 민제에게 글을 배우다가 그의 딸과 혼인을 하였다. 태종이 그를 ‘선달(先達) 어른’이라 일컬었지만, 남들에게는 ‘사부(師傅)’라고 소개할 정도로 존경하였다. 또 민제는 하륜과 이무 · 조호(趙瑚) 등과 뜻을 같이하는 친구 사이였다. 그의 소개로 하륜은 태종의 책사(策士)가 되었다. 그러나 이무와 조호는 1410년(태종10) <이무의 난언> 사건으로, 민무구 형제와 함께 모두 처형되었다.
[묘소와 비문]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묘소는 경기도 해풍군(海豐郡) 중련리(中連里)에 있는데, 1424년(세종6) 부인과 합장되었다. 외손자 세종의 부탁으로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남아 있다. 부인 여산송씨(礪山宋氏)는 여량군(礪良君) 송선(宋璿)의 딸인데, 자녀는 4남 3녀를 두었다. 장남은 민무구, 차남은 민무질, 3남은 민무휼, 4남은 민무회인데, 모두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장녀는 동북면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 조박(趙璞)의 처이고, 2녀는 태종의 왕비 원경왕후이며, 3녀는 좌의정 노한(盧閈)의 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