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총론]
[1559년(명종14)∼1594년(선조27) = 36세]. 조선 중기 선조 때의 문신. 자는 경응(景應), 호는 양졸당(養拙堂)이다. 본관은 여흥(驪興)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무공랑(務功郞)민이(閔涖)이고, 어머니 전주이씨(全州李氏)는 태인부수(泰仁副守) 이관(李琯)의 딸이다. 황해도관찰사 민기문(閔起文)의 손자이고, 돈녕부 도정(都正)민유경(閔有慶)의 4촌이다.
[선조 시대 활동]
나이 6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조부 민기문의 밑에서 자라며 엄한 교육을 받았는데, 16세에 할아버지마저 돌아가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공부하였다. 1589년(선조22)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1년(선조24) 식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3세였다.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출신 집안이 좋아서 장래가 촉망되었다. 그리하여 바로 성균관 전적(典籍)에 임명되었다가 사헌부 감찰(監察)로 옮겼고, 예조 좌랑을 거쳐 병조 좌랑으로 옮겼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연로한 어머니를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갔다가 강화도에서 의병을 이끌고 있던 우성전(禹性傳)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서, 일을 계획하고 의병을 움직였다. 이어 수참판관(水站判官)에 임명되었다가, 1593년(선조26) 선조가 환도한 다음에, 경기도도사(京畿道都事)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교서관 교리(校理)로 옮겼고, 호조 좌랑을 거쳐 호조 정랑에 임명되었으며, 춘추관 기주관(記注官)을 겸임하였다. 대관(臺官)에 의망(擬望)되었으나, 전쟁 중에 재정을 맡은 호조 정랑의 책임이 무거워서 다른 자리로 쉽게 옮기지 못하다가, 병이 심해져서 1594년(선조27) 9월 집에서 죽었는데, 향년이 겨우 36세였다.
[비문과 후손]
아들 민성휘(閔聖徽)의 친구 이경석(李景奭)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백헌집(白軒集)』 권46) 죽은 뒤에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부인 해주정씨(海州鄭氏)는 우승지(右承旨) 정척(鄭惕)의 딸인데, 자녀는 4남을 두었다. 3남 민성휘는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 판서를 지냈고, 4남 민성복(閔聖復)은 현감(縣監)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