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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95년(선조28)∼1659년(효종10) = 65세]. 조선 중기 인조∼효종 때의 문신. 자는 중집(仲集)이고, 본관은 여흥(驪興)인데,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경주부윤(慶州府尹) 민기(閔機)이고, 어머니 남양홍씨(南陽洪氏)는 홍익현(洪翼賢)의 딸이다. 호조 정랑 민여준(閔汝俊)의 손자이고, 숙종비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조부이다.
[인조 시대 활동]
젊었을 때 병을 잘 앓았으므로 부모가 과거 공부를 시키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그는 스스로 학문하는 방법을 터득하여 약관의 나이에 향시(鄕試)에 합격하였다. 22세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인조 초에 음직(蔭職)으로 별검(別檢)에 보임되었다가, 참군(參軍)으로 승진하였다. 1628년(인조6) 알성(謁聖) 문과(文科)에 장원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4세였다. 그때 아버지 민기가 승지로 있으면서 인조 앞에서 급제자의 봉미(封彌)를 뜯어서 시권(試券)을 바쳤는데, 인조가 읽어보고 칭찬하였다. 이때부터 인조는 그를 특별히 아끼고 사랑하였다. 1629년(인조7) 공조 좌랑에 임명되었다가 예조 좌랑으로 옮겼는데, 춘추관 기사관(記事官)을 겸임하였고, 용양위(龍驤衛) 부사과(副司果)가 되었다. 1630년(인조8)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었고, 이듬해 예조 정랑을 거쳐 세자시강원 사서(司書)로 옮겼다가 성균관 직강(直講) ·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다. 1632년(인조10) 부사직(副司直)이 되었다가, 이듬해 종부시(宗簿寺)정(正)이 되었다. 1635년(인조13)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되었다가, 홍문록(弘文錄)에 선임되어, 홍문관 수찬(修撰) · 부교리(副校理)에 임명되었다.
1636년(인조14) 종묘서(宗廟署)영(令)에 임명되었는데, 그때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종묘(宗廟)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 갔다. 이듬해 강화도가 오랑캐 군사에게 함락되자, 송국택(宋國澤)과 함께 원손(元孫: 소현세자 아들)을 모시고 강화도를 탈출하여 교동(喬桐)으로 들어갔다가 당진(唐津)으로 옮겼다. 그 공으로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陞品)되고 호조 참의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금교도찰방(金郊道察訪)을 거쳐, 성주목사(星州牧使)로 나갔다. 1637년(인조15)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었다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자원하여 남원부사(南原府使)로 나갔다. 1644년(인조22) 홍문관 교리(校理)로 임명되었고, 1647년(인조25) 사간원 사간(司諫)이 되었다. 청나라 사신의 접반사(接伴使)를 거쳐 암행어사(暗行御史)로 지방에 파견되었다. 이어 안변부사(安邊府使)로 나가 있을 때는 의창(義倉)을 만들어 빈민을 구제하였다.
[효종 시대 활동]
1652년(효종3)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가, 이듬해 강원도관찰사로 나갔다. 그때 강릉부(江陵府)에서 6월에 서리가 내렸으므로 효종이 관찰사 민광훈에게 그 곳에 혹시 억울한 옥사(獄事)가 있는지를 조사하여 보고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보고하지 않아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1656년(효종7) 다시 복직되어 병조 참의에 임명되었다가 공조 참의로 옮겼는데, 이때 모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상례를 치렀다. 1659년(효종10) 5월 효종이 승하하자 대궐에 나아가 곡읍(哭泣)하다가 전염병에 감염되어, 7월 17일 집에서 죽었는데, 향년이 65세였다.
[성품과 일화]
민광훈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체구가 큼직하고 생김새가 빼어났으며 기개와 도량이 크고 넓었다. 겉으로는 온화하고 평범한 듯 하였으나 실제로 속마음은 굳세고 단단하였다. 그는 공경(公卿)들 사이에서 어진 행실로 이름이 났지만, 남과 교유(交遊)하는 것을 즐겨하지 않았다. 음악과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았으며, 언제나 침묵하고 말이 적었고,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았다. 벼슬길에 나아가서는 청렴하고 자상하여 ‘현명한 관리’라는 평을 들었다. 집안을 다스리는 데 일정한 법도가 있었고, 아랫 사람의 잘못을 덮어주었으므로 안팎이 화목하여 다투는 일이 없었다. 그는 죽을 때 집안 사람에게,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이다.” 하였다. 당시 효종의 산릉(山陵)을 정하지 못하여 조정에서는 서로 갑론을박하며 다투고 있었는데, 그는 병중에 산릉에 대하여 한마디 묻지도 않은 채, 똑바로 앉아서 편안하게 세상을 떠났다.
민광훈과 아들 민시중(閔蓍重) · 민정중(閔鼎重)의 3부자가 모두 장원급제하여 ‘장원한 집안’으로 소문이 났다. 그는 세 아들에게 각자에게 알맞은 교육과 실천을 훈계하였다. 큰 아들에게 경계하기를, “반드시 겸손한 태도로써 남들에게 사양하기에 힘쓰고, 사물을 대할 때에는 반드시 화목하고 유순하기에 힘쓰라.” 하였고, 둘째 아들 민정중이 동래부사(東萊府使)에 임명되자, “물건 하나라도 나 때문에 손해가 나지 않도록 하라.” 하였으며, 막내 아들 민유중이 함경도 경성판관(鏡城判官)으로 좌천되어 나가자, “집에서 멀리 떠나는 것을 염려하지 말고, 고을을 어떻게 잘 다스릴까를 염려하라.” 하였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충청도 충주(忠州) 대양동(大陽洞)에 있는데, 부인의 무덤에 합장하였다. 죽은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부인 연안이씨(延安李氏)는 부원군(府院君) 이광정(李光庭)의 딸인데, 자녀는 3남 3녀를 두었다. 장자 민시중은 대사헌을 지냈고, 차자 민정중은 좌의정을 지냈다. 3자 민유중은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에 봉해졌는데, 그의 딸이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과 교유가 있었는데, 우암은 그의 묘지명(墓誌銘)을 지었고, 동춘당은 딸을 그의 아들인 민유중에게 시집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