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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51년(명종6)∼1593(선조26)= 43세]. 조선 중기 선조 때의 의사(義士). 임진왜란 때에 순절한 의병(義兵). 자는 여징(汝徵), 호는 경암(敬菴)이다. 본관은 능성(綾城)인데, 세거지는 전라도 능주(綾州)이다. 진사 문검(文儉)의 아들이다.
[임진왜란 때 순절]
1582년(선조15) 사마시(司馬試)에 2등으로 합격하였으나, 대과에는 거듭 실패하였다. 1592년(선조25) 4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전라도 능주(綾州)에서 몇 사람의 동지들과 의병(義兵)을 모아 초토사(招討使)고경명(高敬命)의 군대에 들어가서, 그를 따라 금산(錦山)의 싸움에 참가하였다. 그 싸움에서 패배하자 문홍헌은 의병을 수습하여 병사(兵使) 최경회(崔慶會)를 추대하여 맹주(盟主)로 삼고, 그 막하(幕下)의 참모(參謀)가 되었다. 그때 군중(軍中)의 모든 일을 그가 맡아서 관리하였으므로, 그가 아니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한다. 1593년(선조26) 6월 여러 의병장(義兵將)들이 함안(咸安)에서 진주성(晉州城)으로 들어가는데, 최병사가 문홍헌을 가로막으면서, “그대의 무리가 따라가서 한갓 죽기만 하는 것은 아무런 보탬이 안 된다.” 하였다. 그리고 곧장 전라도로 돌아가서 다시 의병을 모아 거사를 도모하는 것이 좋겠다고 만류하였다. 그러나 문홍헌은 “이미 함께 일하기로 하였는데, 의리로 보더라도 혼자만 살 수가 없습니다.” 하고, 끝내 진주성으로 따라 들어갔다. 왜적과 싸우다가 진주성이 함락되자, 그는 최 병사와 함께 강물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이때 김해 부사 이종인(李宗仁)도 왜적을 양팔에 끼고 강에 몸을 던졌다. 정자(正字) 오차(吳玼), 참봉(參奉) 고경형(高敬兄) 등이 모두 따라 죽었다.
[성품과 추모]
문홍헌은 믿음직하고 의로운 자질을 가지고 있었으며 성격이 온화하고 이론이 공평하였으므로 사람들이 호남 지방의 큰 선비로 반드시 그를 꼽았다고 한다.
안방준(安邦俊)이 지은 유사(遺事)가 남아 있다.(『은봉전서(隱峯全書)』 권8 「문홍헌(文弘獻)」) 사헌부 지평(持平)으로 추증되었고, 능주(綾州)의 포충사우(褒忠祠宇) 삼충각(三忠閣)에 최경회 · 조현(曺顯)과 함께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