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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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한(盧閈)

서지사항
항목명노한(盧閈)
용어구분인명사전
분야왕족
유형인물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총론]
[1376년(우왕2)~1443년(세종25) = 68세]. 조선 초기 정종~세종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유린(有隣), 호는 효사당(孝思堂)이다. 본관은 교하(交河)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고려 대호군(大護軍)노균(盧鈞)이고, 어머니 개성왕씨(開城王氏)는 고려 종실(宗室) 한성부원군(漢城府院君) 왕수(王琇)의 딸이다. 고려 창성군(昌城君) 노진(盧稹)의 손자이며, 공양왕(恭讓王)의 처조카이다. 또 태종의 아랫 동서이고, 세종의 이모부이다.

[여말선초의 활동]
노한은 고려 첨의(僉議) 정승(政丞) 노정(盧頙)의 증손자였으므로, 음보(蔭補)로서 고려말 공양왕 때 적경서(積慶署) 승(丞)에 보임되었다가, 전농시(典農寺) 직장(直長) · 예빈시(禮賓寺) 소경(少卿) 등을 역임하였다. 이 시기에 민제(閔霽)의 막내딸과 혼인하여, 둘째딸과 혼인한 이방원(李芳遠: 태종)과 동서 사이가 되었다. 1392년 조선이 개국한 뒤에 태조 시대 7년 동안 그는 전혀 벼슬을 하지 못하였는데, 이것은 당시 실권을 잡았던 정도전(鄭道傳)이 세자 이방석(李芳碩)을 받들고 이방원 일파를 견제하였기 때문이다. 이방원이 <제 1,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서 실권을 잡은 뒤에, 1399년(정종1) 형조 의랑(議郞: 좌랑)을 거쳐, 1400년(정종2) 공조 의랑에 임명되었다. 처음에 사헌부 시사(侍史)에 임명되었으나, 장인 민제가 우정승으로 있었기 때문에 그 사위를 정승을 감찰하는 헌관(憲官)으로 삼을 수 없다는 세자 이방원의 말에 따라 공조 의랑으로 바꾸어 임명하였다.

[태종 시대 활동]
1400년 11월 태종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자, 노한은 1401년(태종1) 봉상시(奉常寺) 경(卿)에 임명되었다가, 삼사(三司) 좌사(左使)로 옮겼고, 대호군(大護軍)을 거쳐 사간원 지사(知事)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과거에 합격하지 않고 대간(臺諫)의 당상관으로 오르기가 아주 어려웠는데, 그는 임금의 지친(至親)이라서 청요직(淸要職)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만큼 왕가의 권력 싸움에 쉽게 휘말릴 수 있는 위험이 많았다. 1403년(태종3) 상호군(上護軍)에 임명되어 합문(閤門: 통례원) 판사(判事)를 겸임하였고, 지방의 감사(監司)와 수령(守令)들이 저지르는 불법을 비밀리에 염탐하기 위한 염문사(廉問使: 후대의 암행어사)에 임명되어 경상도 · 전라도 · 충청도의 하삼도(下三道)를 염찰(廉察)하였다. 1404년(태종4) 승정원 우부대언(右副代言: 우부승지)으로 발탁되었다가, 예조 지사를 거쳐 이조 전서(典書: 판서)로 승진하였고, 경기도관찰사로 나갔다. 이때 그의 나이가 불과 29세였다. 1406년(태종6)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에 임명되어 천추사(千秋使)로서 중국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와서, 이듬해 풍해도도관찰사(豊海道都觀察使)에 임명되었다. 1408(태종8) 한성부윤(漢城府尹)이 되었으나, 이듬해 처남 <민무구(閔無咎) 형제의 옥사(獄事)>가 일어나 관직에서 쫓겨났는데, 나이가 33세였다.

[민무구 형제의 옥사와 노한]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장인 민제와 처남 민무구 · 민무질(閔無疾) 형제의 도움이 컸었다. 장인 민제는 책사(策士) 하륜(河崙)을 소개하였고 <제 1, 2차 왕자의 난> 때, 부인 민씨는 태종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었으며 민무구 형제는 이숙번(李叔蕃)과 함께 남은(南誾)의 군사와 이방간(李芳幹)의 군사와 목숨을 걸고 싸워 승리하였다. 노한의 활약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그의 비문에 보이는 “국가 경영을 자임(自任)하고 집안일 따위는 돌보지 않았다.”라는 구절에서 그도 어떤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는 9척의 장신(長身)으로 힘도 세었기 때문에 그가 무공을 세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태종이 즉위한 뒤, 태종과 원경왕후와의 사이에 불화가 일어났다. 세자 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가 원경왕후를 옹호하면서 태종과 자주 충돌하는 바람에 그의 세자 자리도 위태로워졌다. 민무구 형제는 조카들이 왕위에 오르지 못할까 불안해했다. 그러자 1406년(태종6) 태종이 세자에게 양위하겠다고 공표하면서 세자 주변의 민무구 · 민무질 형제와 실권자들의 반응을 살폈다. 민제는 양위선언에 태종의 숨은 의도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아들인 민무구 · 민무질 형제에게 언행을 조심하도록 거듭 경계하였다. 1407년(태종7) 세자의 정혼(定婚) 문제로 마침내 <민무구 형제의 옥사>가 일어나 민무구 형제는 연안(延安)으로 귀양을 갔다. 4개월 후, 궁중의 원경왕후가 태종의 금령(禁令)을 어기고 친정의 아버지 민제와 연락을 주고받다가 왕후의 자리마저 위태롭게 되었다. 1408년(태종8) 민제가 죽고 난 다음에 민무구 형제는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1410년(태종10) <이무(李茂)의 난언(亂言)> 사건이 일어나자, 태종은 민무구 형제를 이에 연루시켜서 이무와 함께 처형하였다. 이때 한성부윤으로 있던 노한도 <민무구의 옥사>와 <이무의 난언>에 연루되어 체포당하여 대질 심문을 받았다. 노한은 감옥에 갇히자 이미 죽을 각오를 하고, 자기가 들은 것을 하나도 숨기지 않고 고백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죽음을 면하고 귀양을 갔다. 그 뒤에 태종의 하교로 외방종편(外方從便)되었는데, 가족과 함께 양주(楊州)의 별장(別莊)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14년 동안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살았다.

[세종 시대 활동]
양녕대군이 폐세자 된 후, 충녕대군(忠寧大君: 세종)이 세자가 되었다가 1418년 태종의 선위로 왕위에 올랐다. 세종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그 장인 심온(沈溫)은 죽음을 당하고 그 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친정 집안은 멸망당하였다. 그런데 노한의 외동아들 노물재(盧勿齋)가 소헌왕후의 아우와 혼인하였기 때문에 아버지 노한과 아들 노물재는 똑같은 처지가 되었다. 1422년(세종4) 태종은 임종이 가까워지자 노한을 불러 들여, 그의 죄를 용서하고 편한 대로 거주할 것[외방종편]을 하교한 다음, 세종에게는 그의 서용을 부탁하였다. 1425년(세종7) 세종은 태종의 뜻에 따라 노한의 직첩을 되돌려주고, 뒤이어 노한의 아내 민씨(閔氏)를 명혜택주(明惠宅主)로 봉하였다.

1427년(세종9) 세종은 노한을 한성부윤으로 복직시킨 다음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품(陞品)하여 형조 판서에 임명하였다. 이어 노한은 1428년(세종 10) 원접사(遠接使)에 임명되어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였고, 의정부 참찬(參贊)으로 승진하였다. 1430년(세종12) 오위도총부 도총제(都摠制)를 거쳐, 이듬해 한성부판사(漢城府判事)에 임명되었다. 1432년(세종14) 종1품하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품되고 의정부 우찬성(右贊成)으로 승진하였고,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태평관(太平館)을 개축하고 대궐의 강녕전(康寧殿) 조성하는 제조(提調)가 되어 이듬해 건물을 각각 완성하니, 세종이 이모부 노한을 위로하는 잔치를 베풀었다. 1434년(세종16) 의정부 찬성으로서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을 겸임하였다. 1435년(세종17) 정1품상 대광보국 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로 승품되고, 의정부 우의정(右議政)에 임명되어 병조 판사를 겸임하였다. 이어 하등극사(賀登極使)에 임명되어 중추원 동지사 민의생(閔義生)과 함께 명나라 북경으로 가서 영종(英宗) 정통제(正統帝)의 등극(登極)을 하례하였다.

1437년(세종19) 이천(李蕆)이 파저강(婆猪江: 동가강) 야인(野人)을 정벌하였을 때, 노한은 그 성과가 대단치 않다고 주장하다가 우의정에서 파직되었다. 그 뒤에 그는 양주 별장으로 돌아가 80세가 넘은 노모를 모시고 살다가, 1439년(세종21) 모친상을 당하자 금천(衿川: 시흥) 고사리(高寺里)의 언덕에 장사지내고 그 곁에 집을 짓고 시묘(侍墓)하면서 죽을 때까지 살았다. 1443년(세종25) 7월 초1일 병으로 서울 집의 정침(正寢)에서 죽으니, 향년이 68세였다.

[성품과 일화]
노한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키가 9척(尺)나 되고 얼굴이 컸으며 풍채가 헌걸찼다. 천성은 활달하고 너그럽고 화평하였다. 그러나 남에게 구차스레 말하지 않았고, 말하면서도 잘 웃지 않았다. 집에서 한가롭게 홀로 있을 때에도 반드시 의관(衣冠)을 갖추고 단정하게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젊어서부터 손위 동서 이방원을 도와서 국가경영을 자임(自任)하였고 집안 일 따위를 돌보지 않았다. 정승이 되어서는 큰 일을 챙기는 데 힘썼고, 가혹한 형벌을 행하지 않았다. 그는 분석이 명확하고 결단이 정확하였을 뿐만 아니라, 비록 자기의 생사가 걸려 있더라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으므로, 태종의 신임을 받아서 <민무구의 옥사>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1432년(세종14) 노한이 관반사(館伴使)가 되어, 칙사로 온 명나라 환관 창성(昌盛)과 윤봉(尹鳳) 등을 맞았다. 명나라 칙사는 해마다 와서, 중국 황제가 사냥할 때 쓰는 보라매와 사냥개 등을 요구하고, 조금이라도 마음에 맞지 않으면 접반사(接伴使)에게 모욕을 주었다. 그러나 9척 거구에 커다란 얼굴을 가진 노한이 정색을 하고 우렁찬 목소리로 말하여 위엄을 보이자, 횡포를 부리던 창성과 윤봉도 그 위세에 눌려서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였다는 일화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전한다. 또 노한은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관반사가 되었을 때 어머니가 병중에 있자, 낮에는 사신을 접대하고 밤에는 어머니를 간호하였다. 또 어머니가 돌아가자 어머니 묘소 곁에 집을 짓고 시묘하며 지냈고, 자신의 묘소도 그 아래에 두도록 했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공숙(恭肅)이다. 묘소는 경기도 금천 북면(北面) 고사리(高寺里)에 있는데, 1436년(세종18)에 죽은 부인과 합장하였다. 그의 손자 노사신(盧思愼)의 친구 김수온(金守溫)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 부인 여흥민씨(驪興閔氏)는 여흥부원군 민제의 막내딸인데, 태종비 원경왕후의 아우이다. 자녀는 1남 2녀를 두었는데, 외아들 노물재는 돈녕부 동지사를 지냈다. 노물재의 처는 영의정 심온의 딸로, 세종비 소헌왕후의 아우이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정종실록(定宗實錄)』
■ 『태종실록(太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동문선(東文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용재총화(慵齋叢話)』
■ 『임하필기(林下筆記)』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춘정집(春亭集)』
■ 『해동야언(海東野言)』
■ 『사숙재집(私淑齋集)』
■ 『도곡집(陶谷集)』

■ [집필자] 이기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