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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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수신(盧守愼)

서지사항
항목명노수신(盧守愼)
용어구분인명사전
분야정치·행정가
유형인물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총론]
[1515년(중종10)∼1590년(선조23) = 76세]. 조선 중기 중종~선조 때 활동한 문신 · 학자.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蘇齋) · 이재(伊齋) · 암실(暗室) · 여봉노인(茹峰老人)이다. 본관은 광주(光州)이고, 세거지는 경상도 상주(尙州)인데, 서울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활인서(活人署) 별제(別提)노홍(盧鴻)이고, 어머니 성주이씨(星州李氏)는 예조 참판 이자화(李自華)의 딸이다. 풍저창(豊儲倉) 수(守) 노후(盧珝)의 손자이고, 탄수(灘叟) 이연경(李延慶)의 문인(門人)이며 그 사위이다.

[중종 시대 활동]
어려서부터 성리학자로 유명한 이연경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17세 때 그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연경은 광양군(廣陽君) 이세좌(李世佐)의 손자로 홍문관 교리(校理)로 있을 때 경연(經筵)에서 조광조(趙光祖)를 재상으로 천거하였던 사람이다. 1534년(중종29) 사마시에 3등으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0세였다. 그 뒤에 학문을 연마하다가, 27세 때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을 처음으로 만났는데, 학문적 토론을 하면서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543년(중종38)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1등으로 장원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9세였다. 성균관 전적(典籍)에 보임되었고, 홍문관 수찬(修撰)을 거쳐, 1544년(중종39) 시강원 사서(司書)가 되었는데, 이때 서연(書筵)에서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함께 세자(世子: 명종)에게 강론하면서 서로 도학(道學)의 이론을 인정하고 정중하게 대하였다.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다가, 중종이 승하하자, 대행왕(大行王: 죽은 왕)의 행장(行狀)을 지었다.

[을사사화와 노수신]
1544년 11월 인종이 즉위하자, 그 외삼촌 윤임(尹任)이 정권을 잡고 많은 사림파(士林派)의 인물을 등용하였는데, 이언적(李彦迪) · 유관(柳灌) · 성세창(成世昌) 등을 조정의 대관(大官)으로 등용하고, 사림파의 젊은 인재들을 요직에 발탁하였다. 1545년(인종1) 노수신은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는데, 그때 정황(丁熿)과 함께 영의정(領議政) 이기(李芑)를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중종 말엽부터 이미 조정에는 윤임의 대윤(大尹)과 윤원형(尹元衡)의 소윤(小尹)이 대립하고 있었는데, 병조 판서 이기, 호조 판서 임백령(林百齡), 공조 판서 허자(許磁) 등이 소윤의 중심 인물이었다. 그 뒤에 노수신은 이조 좌랑 · 이조 정랑을 역임하면서, 사림파의 인물을 많이 등용하였다.

1545년 7월 인종이 재위한 지 겨우 8개월 만에 죽고, 나이 12세의 어린 명종이 즉위하자 그의 어머니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면서 그 외삼촌 윤원형이 정권을 잡았다. 소윤은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서 영의정 유관과 이조 판서 유인숙(柳仁淑) 등 10여 명을 죽이고, 이조 정랑 노수신과 홍문관 수찬 유희춘(柳希春) 등 1백여 명을 유배하였다. 처음에 노수신은 충주로 유배되었는데, 1547년(명종2) 정언각(鄭彦慤)의 <양재역(良才驛) 벽서(壁書) 사건>에 연루되어 송인수(宋仁壽) · 이약빙(李若氷) 등이 죽음을 당하고 이언적 등이 유배당할 때, 그도 죄가 가중되어 전라도 순천(順天)을 거쳐 진도(珍島)로 이배(移配)되어서, 19년 동안 섬에서 귀양살이 하였다. 그때 제주(濟州)로 귀양갔던 유희춘은 유배지가 고향인 해남(海南)에서 가깝다고 하여 함경도 종성(鍾城)으로 옮겼고(『문소만록(聞韶漫錄)』) 진도에서 귀양살이하던 노수신은 소윤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진도 수령이 죄인이 쌀밥을 먹을 수 없다고 기장만을 사다 주어서 기장밥만 먹고 살았다.(『부계기문(涪溪記聞)』) 그는 이처럼 고통스러운 귀양 생활을 하면서도 오로지 학문의 연구에만 진력하여 책을 여러 권 저술하였고, 어려운 유교의 경전을 여러 책 주석하였다. 1565년(명종20) 문정왕후가 죽고, 명종이 20년 만에 친정(親政)하게 되자, 비로소 <을사사화> 때에 화를 당한 사람들을 유배지에서 풀어주었다. 그때 노수신은 충청도 괴산(槐山)으로 양이(量移)되었는데, 노수신이 진도의 적소(謫所)에서 나오면서, “우리가 은혜를 입은 것은 다행이라고 하겠지만, 후일의 다른 폐단이 없을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그가 후일에 당쟁(黨爭)을 격화시킨 혐의가 없지 않은데, 그가 추천한 정여립(鄭汝立)이 선조 때 모반 사건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67년(선조즉위) 영의정 이준경(李浚慶)의 추천으로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었다. 1568년(선조1) 직제학(直提學)으로 승진하여, 예문관 응교(應敎)를 겸임하였는데, 이때 조광조를 추증하도록 청하니, 선조가 이를 허락하였다. 이후 부제학(副提學)으로 승진하였는데, 고향 상주로 돌아가서 어버이를 봉양하기를 간청하니, 선조가 그의 청을 받아들여 특별히 청주목사(淸州牧使)에 임명하였다가,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바꾸어 임명하였다. 1569년(선조2) 부친상을 당하고 3년 상기(喪期)를 마친 다음, 1571년(선조4)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다가, 대사헌(大司憲)으로 옮겼다. 그러나 그는 극력 사양하면서 고향에 돌아가 병든 어머니를 간호하게 해 달라고 간청하자, 선조가 그 어머니를 모셔오도록 해서, 그는 더 이상 어머니 때문에 벼슬을 사임하지 못하였다.

1572년(선조5) 이조 참판에 임명되었다가 이조 판서로 승진하였다. 노수신이 이조 판서로 오랫동안 있었는데, 그의 아우 노극신(盧克愼) 때문에 청렴하지 못하다는 비난을 들었다. 당시 벼슬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재물을 싣고 그 아우의 집 대문으로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마침 명(明)나라 신종(神宗) 만력제(萬曆帝)가 등극(登極)한 사실을 반포하는 조사(詔使)가 왔는데, 그가 관반사(館伴使)로 나가서 사신을 맞이하였다. 이어 대제학(大提學)에 임명되었다가, 승지(承旨)로 발탁되었다. 1573년(선조6) 우의정(右議政)으로 승진하였으나, 이듬해 경연에서 그가 이조 판서로 있었을 때 사정(私情)을 써서 사람들을 등용하였다고 정언 김성일(金誠一)에게 탄핵을 당하였다. 마침 노수신이 오래도록 병으로 출사하지 못하여, 여러 차례 사직하는 상소를 올리니, 선조가 해임시켰다. 1575년(선조8) 다시 우의정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조정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당파 싸움이 크게 일어났다. 이에 노수신은 선조에게 건의하여, 당파 싸움의 원인을 제공한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 두 사람을 모두 외직(外職)으로 좌천시켜서, 들뜬 조정의 분위기를 진정시켰다.(『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권10)

1578년(선조11) 우의정에서 좌의정(左議政)으로 승진하였으나, 그가 병으로 사임하니 중추부(中樞府) 판사(判事)에 임명되었다. 1581년(선조14)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그의 어머니를 고향 상주로 반장(返葬)하고, 67세의 고령에 여묘살이를 하다가 병을 얻었다. 1583년(선조16) 3년 상기(喪期)를 마치고 다시 좌의정에 임명되자 그가 사임하기를 청하였으나 선조가 허락하지 않았다. 1585(선조18) 나이가 70세가 되었다고 하여 치사(致仕)하기를 청하였으나, 선조가 궤장(几杖)을 하사하고 영의정에 임명하였다. 1588년(선조21) 영의정 노수신이 12번이나 상소하여 사임하니, 중추부 판사에 임명하였다.

1589년(선조22) <정여립의 모반 사건>이 발각되어 옥사(獄事)가 크게 일어났는데, 그가 정여립을 추천하였기 때문에 중추부 판사에서 파직되었다. 이때 좌의정 정철(鄭澈)이 옥사를 주관하였는데, 옥사가 점차 확대되어 이발(李潑) 등 동인이 1천 명이나 연루되었다. 누군가 그에게 해명하기를 권하자, 노수신은, “이미 내가 잘못 추천하였으니 법에 있어서 용서될 수 없는데, 스스로 변명한다고 해서 어찌 오해가 풀릴 일인가?” 하였다. 이때 선조는 노수신이 현인을 천거하라는 명을 받고도 인재를 잘못 추천하였다고 성토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선조는, 권율(權慄)과 이순신(李舜臣)을 추천했던 노수신을 인재를 알아보는 사람이라고 극구 칭찬하였다. 파직된 지 몇 달 만인 1590년(선조23) 4월 7일에 지병으로 죽으니, 향년이 76세였다.

시문(詩文)과 서예(書藝)에 능했으며, 저서로는『소재집(蘇齋集)』13권 8책이 있다.

[노수신의 문장과 학문]
그는 총명하여 널리 글을 배우며 문장(文章)도 익혀서, 15세 이전에 문학으로 명성을 날렸다. 1572년(선조5) 선조가 당대의 문장가를 유희춘에게 물었을 때, 유희춘은 사장(詞章)의 대표적 인물로서 소재 노수신과 지천(芝川) 황정욱(黃廷彧)을 선조에게 추천하였다. 선조 시대 노수신과 황정욱은 문장의 대가로 일컬어졌는데, 두 사람 모두 근체시(近體詩)에 뛰어났다. 허균(許筠)은 두 사람의 문학을 평하기를, “노수신의 ‘오언율시(五言律詩)’와 황정욱의 ‘칠언율시(七言律詩)’는 모두 우리나라 문학 1천 년 역사에서 가장 빼어난 작품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장편시는 율시(律詩)보다 못하니, 그 까닭을 알 수 없다.”고 하였다.(『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권25)

그는 성리학의 이론가로서 더욱 유명하였다. 학문에 잠심(潛心)할 적에 경일(敬一)에 주력할 것을 강조하고, ‘도심미발(道心未發)과 인심이발(人心已發)의 학설’을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양명학(陽明學)도 깊이 연구하였으므로 주자학파의 공격을 받았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서는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과 구암(龜岩) 이정(李楨)은 주자학에 독실하고 정중하여 주자의 이론에 따르고 그 규범만을 지켰으므로 주자학의 이론 발전에는 그다지 기여하지 못한 반면, 남명(南冥) 조식(曺植)은 장자(莊子)의 학설을 받아들이고, 소재 노수신은 육구연(陸九淵)의 양명학(陽明學)을 수용하여, 주자학의 이론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평하였다. 한편 승려 휴정(休靜) · 선수(善修) 등과도 교분이 두터워서, 불교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그는 학문의 이론에 변화가 있었는데, 그가 젊어서 옥당(玉堂)에 있을 때, 경연에서『서경(書經)』을 강론하면서 인심(人心) · 도심(道心)의 설명을 주자의 학설대로 하여 퇴계 이황의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전라도 진도(珍島)로 유배되어 오랫동안 온갖 고통을 겪으면서 명나라 나흠순(羅欽順)의『곤지기(困知記)』 2책을 보고 나서 자신의 기존 학설을 뒤집어서, ‘도심은 미발(未發)이고 인심은 이발(已發)’이라고 해석하게 되었다. 그는 19년 동안의 참기 어려운 귀양 생활을 하면서도 오로지 학문에만 진력하여 이황 · 김인후 · 기대승 등과 서신으로 성리학의 이론을 토론하였다. 또한 「인심도심변(人心道心辨)」, 「집중설(執中說)」을 저술하였고, 진백(陳柏)의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주해하였으며 『대학장구大學章句』와『동몽수지(童蒙須知)』 등을 주석하였다. 특히 『숙흥야매잠』의 주해는 그 뜻이 정밀하고 분명하여, 사림파 사이에 널리 전송(傳誦)되어서 더욱 유명해졌다.

1565년(명종20)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자마자, 한겨울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진국원(鎭國院)으로 기대승을 찾아보고 인심과 도심에 대하여 열띤 논쟁을 벌였다. 그때 노수신은 명나라 나흠순이 지은 『곤지기』의 이론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기대승은 바로 「곤지기론(困知記論)」을 지어서 노수신을 설득하려고 하였다.(『고봉집(高峯集)』 보유편) 이후 기대승은 1568년(선조1) 직제학으로 있을 때 노수신을 선조에게 추천하였다.

[성품과 일화]
성격이 온유하고 원만하여 문장가이자 학자로서 사림파(士林派)의 중망(衆望)을 받았으며, 특히 선조의 지극한 존경과 은총을 받았다. 그는 매사에 지극히 너그러운 사람이었지만, 그가 정승으로 있을 때 의정부 사인들의 술자리는 금지시켰다. 한편, 청렴하다는 명망이 있었는데도 그가 술을 즐겼기 때문에 자신을 지키지 못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그의 덕행과 업적의 성과는 매우 다양하여, 임금과 백성들, 그리고 많은 동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가 진도에 귀양 갔을 때, 그 섬에서 중매없이 처녀를 쟁탈하여 혼인하는 풍속을 보고 예법(禮法)으로써 섬 사람들을 교화하였다. 노수신은 부친상 때 대상(大祥) 후에 바로 흑색의 갓을 쓰는 것이 미안하다고 생각하여 백포립(白布笠)을 쓰고 다녔다. 이후 직제학 정철(鄭澈)이 이를 따랐는데, 나중에는 담제(禫祭) 이전까지는 백포립을 쓰는 것으로 제도화되기에 이르렀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처음에 ‘문의(文懿)’라고 하다가, 나중에 ‘문간(文簡)’으로 고쳤다. 묘소는 경상도 상주 화령(化寧)에 있는데, 부인과 합장하였다. 그는 스스로 자기 비명(碑銘)을 지었는데, 백여 년 뒤에 미수(眉叟) 허목(許穆)이 그 자명(自銘)을 바탕으로 그의 비명을 지어서 무덤에 세웠다.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 · 봉산서원(鳳山書院), 충주의 팔봉서원(八峰書院) · 계상사(溪上祠), 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 진도의 봉암사(鳳巖祠) 등에 제향되었다. 부인 광주이씨(廣州李氏)는 유학자 탄수 이연경의 딸로, 자녀는 1녀를 두었다. 외동딸은 파주목사(坡州牧使) 허징(許澂)에게 시집갔다. 조카 노대해(盧大海)를 후사(後嗣)로 삼았는데, 영천군수(榮川郡守)를 지냈다.

1610년(광해군2) 선조묘(宣祖廟)에 배향할 명신(名臣)을 의논할 때 노수신은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제2열로 거론되었다. 그러나 광해군이 선조 때 그가 시종(始終)을 보전하지 못하였다고 반대하여, 배향되지 못하였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인종실록(仁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국조보감(國朝寶鑑)』
■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소재집(蘇齋集)』
■ 『퇴계집(退溪集)』
■ 『고봉집(高峯集)』
■ 『백사집(白沙集)』
■ 『서애집(西厓集)』
■ 『율곡전서(栗谷全書)』
■ 『학봉전집(鶴峯全集)』
■ 『미수기언(眉叟記言)』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간이집(簡易集)』
■ 『견한잡록(遣閑雜錄)』
■ 『계곡집(谿谷集)』
■ 『담헌서(湛軒書)』
■ 『동각잡기(東閣雜記)』
■ 『동계집(桐溪集)』
■ 『문소만록(聞韶漫錄)』
■ 『백호전서(白湖全書)』
■ 『사계전서(沙溪全書)』
■ 『부계기문(涪溪記聞)』
■ 『상촌집(象村集)』
■ 『석담일기(石潭日記)』
■ 『석주집(石洲集)』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성호사설(星湖僿說)』
■ 『속잡록(續雜錄)』
■ 『송자대전(宋子大全)』
■ 『수당집(修堂集)』
■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 『아계유고(鵝溪遺稿)』
■ 『여헌집(旅軒集)』
■ 『용재집(容齋集)』
■ 『우계집(牛溪集)』
■ 『우서(迂書)』
■ 『응천일록(凝川日錄)』
■ 『임하필기(林下筆記)』
■ 『죽창한화(竹窓閑話)』
■ 『지산집(芝山集)』
■ 『청음집(淸陰集)』
■ 『택당집(澤堂集)』
■ 『포저집(浦渚集)』
■ 『해동잡록(海東雜錄)』

■ [집필자] 이기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