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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27년(세종9)∼1498년(연산군4) = 72세]. 조선 초기 단종~연산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자반(子胖), 호는 보진재(葆眞齋) · 천은당(天隱堂)이다. 본관은 교하(交河)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돈녕부 동지사 노물재(盧物載)이고, 어머니 청송심씨(靑松沈氏)는 영의정 심온(沈溫)의 딸로 세종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아우이다. 우의정 노한(盧閑)의 손자이고, 문종 · 세조의 이종 4촌이다.
[단종~세조 시대 활동]
1451년(문종1)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1453년(단종1)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7세였다. 집현전(集賢殿) 학사(學士)로 선발되어, 집현전 박사(博士)에 보임되었다가 부수찬(副修撰)으로 승진하였다. 이어 성균관 직강(直講)에 임명되고, 예문관 응교(應敎)를 겸임하였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훈되었다. 1458년(세조4) 주문사(奏聞使)의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정사(正使) 한명회(韓明澮)를 따라 중국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와서, 세자 우문학(右文學)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좌문학(左文學)으로 옮겼다. 1460년(세조6)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가, 1462년(세조8)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었으며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승진되었는데, 승지로 임명되면서 무려 5자급이 올랐다. 1463년(세조9) 도승지(都承旨)로 영전되었는데, 세조가 국가의 중요한 기무(機務)를 모두 노사신에게 맡겼다. 1465년(세조11) 종1품하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품(陞品)되어, 호조 판서에 임명되었다가,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 호조 판서로 있을 때 최항(崔恒)과 함께 『경국대전(經國大典)』을 편찬하였다. 1466년(세조12) 발영시(拔英試)에 1등으로 급제하고, 등준시(登俊試)에 2등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40세였다. 등준시 합격자를 승품(陞品)하였으나, 노사신은 품계가 높아서 그 맏아들 노공필(盧公弼)에게 대신 가자(加資)하였다. 1467년(세조13) 호조 판서로서 홍문관 대제학(大提學)을 겸임하였다. 그때 강순(康純)이 건주위(建州衛) 여진을 정벌하였는데, 함길도선위사에 임명되어 동북면(東北面)으로 가서, 함길도의 백성들을 안정시켰다. 건주위 여진 정벌이 끝난 다음에 군공 2등으로 책훈되었다. 1468년(세조14) 세조의 명을 받고 조석문(曺錫文)과 함께 『북정록(北征錄)』을 편찬하였다.
[예종~성종 시대 활동]
1468년(예종즉위) <남이(南怡) · 강순 등의 역모(逆謀) 사건>을 다스려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에 책훈(策勳)되고 선성군(宣城君)에 봉해졌다. 1469년(예종1) 의정부 우참찬(右參贊) · 좌참찬(左參贊)을 거쳐 우찬성(右贊成)에 올랐다. 이때 명나라 사신 강호(姜浩)의 접반사(接伴使)에 임명되어 접대하니, 강호가 “예를 안다.”고 칭찬하였다.
1470년 성종이 즉위하자, 정1품 숭록대부(崇綠大夫)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에 임명되어, 이조 판서를 겸임하였고, 이듬해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에 책훈되었다. 1476년(성종7) 돈녕부 영사가 되었다가, 1480년(성종11) 개성부선위사(開城府宣慰使)가 되었는데, 이때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이 완성되자, 이를 성종에게 바쳤다. 1481년(성종12) 선성부원군(宣城府院君)으로 진봉(進封)되면서, 성종의 전교로 나이 55세에 기영회(耆英會)에 진참(進參)하게 되었다. 그 후에 계속 기로소(耆老所)에 참여하였는데, 『견한잡록(遣閑雜錄)』에 따르면 영의정(議政)으로 70세가 넘도록 기로소에 나간 사람은 노사신과 황희(黃喜) 등이었다고 한다. 1482년(성종13) 평안도와 경기도에 기근(饑饉)이 들자, 노사신이 평안도진휼사로 임명되어 기민(饑民)을 구휼(救恤)하였다. 이때 성종의 명령을 받고 『강목신증(綱目新增)』을 편찬하고, 『연주시격(聯珠詩格)』과 『황산곡시집(黃山谷詩集)』을 번역하였다. 1485년(성종16) 진휼사로서 호조 판서를 겸임하였고, 이듬해 중추부 영사로 승진하였다. 1487년(성종18) 정1품상 대광보국 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는데, 하등극사(賀登極使)에 임명되어 표문(表文)을 받들고 중국 북경에 가서 명나라 효종(孝宗) 홍치제(弘治帝)의 등극(登極)을 하례하고 돌아왔다. 이때 성종이 노사신에게 물소[水牛] 암수 한 쌍을 내려주었는데, 그가 중국에서 하사 받은 것이다. 1491년(성종22) 도원수(都元帥)허종(許琮)이 군사를 거느리고 이마거(尼麻車) 우디케를 정벌할 때 영안도절도사 성준(成俊)이 부원수로서 군사를 이끌고 적진 깊숙이 울지(鬱地: Weji)에다 진(陣)을 쳤다. 그리하여 북도(北道)에는 오랑캐를 방어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노사신이 영안도도체찰사에 임명되어 동북 지방을 방비하면서 사민정책(徙民政策)을 실행하였다. 이마거 우디케는 연해주(沿海州) 포세이트만 부근에서 물고기(Nimaha)를 잡고 살던 야인(野人) 여진이었다. 야인 여진의 정벌에 성공을 거두자, 1492년(성종23) 성종은 노사신을 좌의정(左議政)에 임명하였다. 1493년(성종24) 그의 막내아들 노공유(盧公裕)가 승지(承旨)에 임명되었다. 1494년(성종25) 그가 문과(文科)의 독권관(讀券官)이 되었을 때, 처조카 경세창(慶世昌)이 문과에 급제하자 대간(臺諫)에서 과거에 부정이 있었다고 탄핵하였으나 성종은 그를 신임하였다.
[연산군 시대 활동]
1494년 성종이 승하하자, 산릉간심사(山陵看審事)에 임명되어, 성종의 산릉 자리를 광평대군(廣平大君)의 묘소로 정하였다. 신하의 명당(明堂) 자리는 임금에게 양보해야 하므로, 광평대군의 무덤을 옮기고 성종을 그 묘터에 장사지냈는데, 지금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三成洞)에 있는 선릉(宣陵)이다. 1495년(연산군1) 시호(諡號)와 묘호(廟號) 등을 의논할 때 의견이 분분하였으나, 그의 주장에 따라 ‘성종(成宗)’으로 결정하였다. 69세에 나이가 많다고 치사(致仕)하기를 청하니, 연산군이 윤허하지 않고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 1496년(연산군2) 다시 노사신이 원상(院相)의 직위를 사면해주도록 간청하니, 연산군이 허락하고 노사신이 70세가 되었다며 정식으로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 그때 맏아들 노공필이 예조 판서가 되었는데, 대간에서 노사신을 영의정에서 물러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연산군은 세종 때 정승 허조(許稠)와 판서 허후(許詡) 부자의 전례가 있다며 들어주지 않았다.
1497년(연산군3) 연산군은 영의정 노사신 등에게 명하여 생모 윤씨(尹氏: 제헌왕후)의 묘호(廟號)를 의논하게 하니, 사당을 효사당(孝思堂)으로, 묘소를 회묘(懷墓)로 정하였다. 1498년(연산군4) 실록청(實錄廳)을 개설하여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하였는데, 이극돈(李克墩)이 사초(史草)에서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발견하고 유자광(柳子光)과 함께 연산군에게 고발하여,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켰다. 이때 노사신은 윤필상(尹弼商)과 함께 추국청(推鞫廳)의 재상으로서 추국에 참여하였는데, 김종직(金宗直)의 제자 김일손(金馹孫) · 권오복(權五福) · 이목(李穆) 등이 잡혀와 심문을 당하였다. 윤필상 · 유자광 · 성준 등이 그들을 붕당(朋黨)이라 지목하여 일망타진하려 하였으나, 노사신은 “동한(東漢)에서 명사(名士)들을 금고(禁錮)하다가 나라조차 망했다.”고 하면서 그들을 변호하고 구원하였다.(『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 참조) 그러나 후대 사림파로부터의 비난을 면하지는 못하였다. 옥사가 끝난 다음에 연산군이 추관(推官)이었던 당상관(堂上官)과 낭청(郞廳)에게 각각 반당(伴儻)과 구사(丘史), 전지(田地)와 가옥 등을 하사하였으나 <중종반정(中宗反正)> 직후에 중종이 이것을 모두 몰수하였다. 무오사화가 일어난 지 불과 2개월 뒤에 1498년(연산군4) 9월 9일(壬寅日) 노병으로 죽으니, 향년이 72세였다. 그가 임종할 때 연산군이 승지 홍식(洪湜)을 보내어 하고 싶은 말을 물으니, “신의 소원은, 상벌을 알맞게 시행하는 것과 전하가 부지런히 경연에 나오는 것 뿐입니다.” 하니, 사람들이 당시 연산군에게 가장 적절한 충언(忠言)이라고 하였다.
[조선 초기 서적 편찬]
조선 초기 세조와 성종 시대 문치를 도와서 여러 가지 서적을 편찬하였다. 1465년(세조 11) 호조 판서가 되었을 때 최항과 함께 『경국대전(經國大典)』의 편찬을 총괄하였는데, 그는 6전(典) 중에서 호전(戶典)의 편찬을 직접 담당하기도 하였다. 이 책은 성종 때 완성되었는데, 조선 시대 모든 정령(政令)과 형률(刑律)의 기본 지침이 되었다. 중국은 율(律)과 영(令)을 나누어 편찬하였으나, 우리나라에서는 하나로 합쳐서 편찬하였다. 또 역사책과 지리지의 편찬도 담당하였다. 1476년(성종7) 서거정(徐居正) · 이파(李坡)와 함께『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를 편찬하고, 1481년(성종12) 서거정과 함께『동국통감(東國通鑑)』을 편찬하여, 고구려 · 백제 · 신라의 3국 시대와 고려 · 조선으로 이어지는 우리 역사의 정통성을 확립하였다. 이 책들은 노사신과 서거정 등의 역사의식을 반영하고 있어서, 한국 사학사(史學史)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1468년(세조14) 조석문과 함께 『북정록』을 편찬하였는데, 이것은 신숙주(申叔舟)가 1460년(세조6) 세조의 명을 받고 모련위(毛憐衛) 여진을 정벌한 사실을 연대순으로 자세하게 기록한 책이다. 모련위는 오늘날 함경북도 일대에 살던 별종 오랑캐였다. 이 책은 당시 여진족을 연구하는 데에 귀중한 자료인데, 신숙주의 원안 기록이 실록 편찬의 사료가 되었으므로, 대부분 『세조실록』의 내용과 동일하다.
성종 초년에 강희맹(姜希孟) · 서거정 · 성임(成任) · 양성지(梁誠之)와 함께 왕명을 받고, 인문지리서 『여지승람(輿地勝覽)』을 편찬하였다. 세종 시대 편찬된 『지리지(地理志)』는 체제가 간결하고 자료가 정확하나, 그 뒤에 명나라에서 편찬된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와 비교하면, 인물 · 분묘(墳墓) · 누관(樓觀)과 시장(詩章)이 빠져 있었다. 성종이 1476년(성종7)부터 수집한 ‘동국문사 시문(東國文士詩文)’을 각 지방의 인물과 산천, 분묘와 건축물 등의 관련 항목에 나누어 넣어 인문 지리서를 편찬하게 하여 1480년(성종11) 『동국여지승람』이 완성되었다. 노사신이 『동국여지승람』을 바치면서 전문(箋文)을 지어 그 동안의 경과를 보고하니, 성종이 이를 읽어보고 크게 기뻐하여 ‘동국여지승람’이라는 이름을 내려주었고, 인쇄하여 중외에 반포하였다. 그 밖에 1482년(성종13)에는 이극돈과 함께『통감강목(通鑑綱目)』을 증보(增補)하여 『강목신증』을 편찬하였다. 이듬해 『연주시격』과 『황산곡시집』을 서거정 · 어세겸(魚世謙) 등과 함께 언문으로 번역하여 간행하였고, 불경도 많이 언해(諺解)하였다.
[사장파의 학문 연구]
그는 어렸을 때 금천(衿川)의 선산(先山) 아래 정자에서 할아버지 노한으로부터 글을 배우다가, 조금 자라서는 홍응(洪應)의 외삼촌 참찬 윤형(尹炯)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친구 홍응과 서로 경쟁하면서 글을 배우고 부지런히 익혔는데, 하루에 수백 글자를 기억하였으므로, 윤형이 나이 어린 조카 홍응에게 농담하기를, “노씨네 집 아이는 참으로 원대한 그릇이다. 장차 그 명성과 지위가 아마도 너와 엇비슷할 것이다.” 하였는데, 뒤에 두 사람이 모두 정승의 반열에 오르고 훈구파(勳舊派)를 대표하는 문장가가 되었다. 젊어서부터 그는 배우기를 좋아하여 남에게 모르는 것을 두루 물었고, 또 독서하기를 좋아하여 평소에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경서(經書) · 사서(史書) · 백가서(百家書)는 물론이고, 불교의 석전(釋典), 도교의 도장(道藏)에 이르기까지 모두 널리 통달하였고, 성리학(性理學)의 연원(淵源)을 깊이 연구하여 그 심오한 뜻을 밝게 알았으므로, 당시 주자학의 이론에 정통한 사람은 오로지 노사신 한 사람뿐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또 시문(詩文)을 짓는 데도 고어(古語) 쓰기를 좋아하고, 붓을 잡으면 화려한 문장이 이어졌다. 27세에 집현전 학사로 선발되어 집현전에 들어가서 박사가 되었는데, 날마다 장서각(藏書閣)에 나아가서 깊숙이 쌓인 책들을 어지럽게 뽑아내놓고 언제나 정성을 기울여 책을 읽고 연구하다가 문득 식사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책에 빠져 있는 때가 많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진짜 박사(博士)’라고 일컬었다. 그는 유교의 서사(書史)를 널리 읽어서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불경 · 도장까지도 모두 정통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학문이 유불선(儒佛仙)을 아울렀으므로, 김종직의 사림파가 유학의 송학(宋學)만을 연구하였던 것보다 학문의 폭이 넓고, 그 뜻이 활달하였다. 만년에 거처하는 서실을 ‘천은당(天隱堂)’이라 이름하고, 큰 방의 좌우에 도서를 가득 쌓아놓았으며 옛사람의 서화도 걸어놓고, 그것을 홀로 보면서 즐겼다.
[성품과 일화]
그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성품이 너그럽고 도량이 넓으며, 기개가 있고 뜻이 커서, 세상의 괴롭고 어수선한 일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성격이 조용한 것을 좋아하여 평생 번잡한 시가지를 싫어하고 성 서쪽 모퉁이에 있는 초가집[茅堂]에서 즐겨 살았는데, 그 집을 ‘자기 순수성을 지키고 산다’는 뜻의 ‘보진재(葆眞齋)’라고 일컫고, 자기의 호로 삼았다. 손님이 찾아오면 반드시 술을 대접하였는데, 취흥(醉興)만을 즐겼을 뿐이다.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으나, 검소한 생활을 하고 호사스러운 생활을 일체 멀리 하였으며, 정해진 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재물을 늘리는 데에도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에게는 해미현(海美縣)에 떨어져 사는 노비(奴婢)가 있었는데, 구씨(具氏)라는 고을 사람이 자기의 소유라고 주장하고 송사(訟事)를 제기하였으나 송사에서 패배하였다. 구씨가 그를 찾아와 호소하기를, “나는 겨룰 만한 힘이 없습니다. 이 사람만을 의지해서 살아가고 있는데, 장차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하니, 그를 가엾게 여겨서 노비문서를 가져다가 불태우고, 그 노비를 넘겨주니, 고을 사람이 감동하였다.
그는 세조와 뜻이 잘 맞았으나 때로는 지나쳐 아첨이 심하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세조가 노사신과 고금(古今)의 사실을 논하였는데, 그의 말이 뜻에 잘 맞자 그를 5자급(資級)이나 올려서 승지로 발탁하기도 하였다. 또 세조가 용문사(龍門寺)에 거둥하였을 때 구름을 보고 백의(白衣)를 입은 관음보살이 현상(現象)하였다고 하자, 노사신만이 맞장구를 치기도 하였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문광(文匡)이다. 묘소는 경기도 금천(衿川) 북면(北面) 고사리(高寺里)의 선영에 있고 부인과 합장하였다. 허백당(虛白堂) 홍귀달(洪貴達)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 부인 경씨(慶氏)는 중추부 첨지사 경유근(慶由謹)의 딸인데, 자녀는 4남 1녀를 두었다. 장자 노공필(盧公弼)은 문과에 급제하여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을 지냈고, 차남 노공저(盧公著)는 현릉(顯陵)참봉(參奉)을 지냈다. 3남 노공석(盧公奭)은 호조 정랑을 지냈고, 4남 노공유(盧公裕)는 돈녕부 도정을 지냈으며, 외동딸은 종친부(宗親府)전부(典簿) 구장손(具長孫)에게 시집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