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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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진(趙希進)

서지사항
항목명조희진(趙希進)
용어구분인명사전
분야정치·행정가
유형인물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총론]
[1579년(선조12)∼1644년(인조22) = 66세]. 조선 중기 광해군∼인조 때의 문신. 자는 여숙(與叔), 호는 단포(丹圃)이다. 본관은 임천(林川)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동부승지(同副承旨)조원(趙瑗)이고, 어머니 전의이씨(全義李氏)는 병조 판서 이준민(李俊民)의 딸이다. 병조 좌랑 조응공(趙應恭)의 손자이고, 예조 참판 조희일(趙希逸)의 아우이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06년(선조39)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여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서 공부하였다. 1611년(광해군3) 조희진(趙希進)은 관학(館學) 유생을 이끌고 북인(北人) 정인홍(鄭仁弘)의 사악한 설을 배척하기를 청하는 상소를 하였다. 이에 광해군은 “그대들의 논의가 지나치다. 이처럼 소요를 일으키지 말라.” 하였다. 알성시(謁聖試)에서 1등으로 뽑혔으나, 탁호(拆號: 시권을 열어 봄)할 때에 글자 하나가 규정에 위배되었다는 이유로 합격자 명단에서 빠졌다. 1616년(광해군8) 별시(別試) 문과(文科)에 합격하여, 성균관 권지 학유(權知學諭)에 보임되었다. 이어 1618년(광해군10) 군자감(軍資監) 참봉(參奉)에 임명되어, 광흥창(廣興倉)을 관리하였는데, 쌀과 콩의 결손된 양이 1백 8십여 석이나 되었으므로, 벽사찰방(碧沙察訪)으로 쫓겨났다. 광해군의 정사가 혼미해지고 충량(忠良)들이 배척당하는 것을 본 후 벼슬을 사임하고, 집에 틀어박혀 오로지 서사(書史)를 연구하는 것만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허균의 서궁 투서 사건]
광해군 시대 정치가 혼란해지자 우찬성(右贊成)허균(許筠)이 이이첨(李爾瞻)과 함께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면서, 반대파를 숙청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1616년(광해군8) 사람을 시켜서 광해군의 폭정(暴政)을 열거한 언문의 글을 서궁(西宮)에 투서(投書)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 범인으로 그의 셋째형 조희일을 지목하였다. 이어 1617년(광해군9) 이이첨의 심복으로 허균의 사주를 받은 그의 이종사촌 이위경(李偉卿)에 의하여 조희일은 죄를 뒤집어쓰고 평안도 이산(理山)으로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조희진의 맏형 조희정(趙希正)과 둘째형 조희철(趙希哲)은 모두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어머니를 지키다가 죽음을 당하였는데, 셋째형 조희일(趙希逸)마저 멀리 귀양가게 되자, 당시 70세를 넘긴 그의 어머니는 밤낮으로 울부짖다가 쓰러졌다. 이에 동생 조희진은 범인을 밝히려고 백방으로 애를 쓰는 한편, 아는 사람들을 통하여 당로(當路)에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마침내 2년 만에 허균 일당이 사건을 조작한 것이 밝혀지면서, 1619년(광해군11) 그의 형 조희일은 유배지에서 풀려나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병상의 어머니가 셋째 아들 조희일을 만나서 기뻐하다가, 그 해에 편안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천 길이나 되는 깊은 함정으로부터 형님을 구출하여 노모(老母)를 기쁘게 해드렸다.”라고 칭찬하였다.

[인조 시대 활동]
1623년(인조1)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비로소 면신(免新)하여 천거를 받아 승정원(承政院) 주서(注書)에 임명되었고, 병조의 낭관(郎官)을 거쳐, 성균관 박사(博士) · 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다. 공조 좌랑으로 옮겼다가, 의령현령(宜寧縣令)으로 나갔다. 그때 이조판서 오윤겸(吳允謙)이 그를 의령현(宜寧縣)에 의망(擬望)하니, 인조가 돌아보면서 “시종(侍從)에 둘 만한데, 어째서 갑자기 외직에 보임하는가?” 하였다. 그는 내직에 있는 것을 즐겁게 여기지 않아서, 또 외직으로 나가기를 자청하여 서산군수(瑞山郡守)로 나갔다. 그 후에 내외 관직을 두루 거쳐서 관위(官位)가 3품에 이르렀다. 내직으로는 성균관 직강(直講), 공조 정랑, 봉상시(奉常寺) 첨정(僉正) · 장악원(掌樂院) 첨정, 사옹원(司饔院) 정(正) · 사도시(司䆃寺) 정 · 군자감(軍資監) 정 · 장악원 정을 역임하였고, 외직으로는 황해도 도사(都事) · 청송부사(靑松府使)를 지냈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봉상시 정으로 있었는데, 미처 인조를 남한산성(南漢山城)까지 호종(扈從)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뒤늦게 강화도(江華島)로 들어갔다. 그리고 강화도를 지키던 수신(守臣)들을 만나서 방비할 대책을 마련하도록 청하였으나, 여러 사람들이 강화도의 험요(險要)한 지세(地勢)만을 믿고서 그가 너무 겁을 낸다고 비웃었다. 그러나 결국 강화도는 적에게 함락당하고 말았는데, 그는 이것을 항상 통분하게 여기고 당시 수신들에게 분개하였다. 1644년(인조22) 9월 11일 청송부사(靑松府使)로 재임하다가, 고을 관아(官衙)에서 객사(客死)하였는데, 향년이 66세이다.

그는 시문(詩文)에 뛰어나서 작품이 매우 많았으나 난리를 겪으면서 거의 유실되었다. 저서로는 『단보유고(丹圃遺稿)』가 있다.

[성품과 일화]
조희진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몸가짐이 단정하고 엄숙하며 지론(持論)이 뚜렷하고 소신을 굽히는 바가 없었기 때문에 그를 좋아하지 않는 자도 많았다. 그는 맡은 관직의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성실하고 부지런히 하였다. 오직 일의 정당성을 살폈을 뿐으로, 형세나 사람 때문에 흔들리는 경우가 없었다. 구차스럽게 남에게 동조하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마음속으로 옳게 여기지 않는 자는 비록 집정자(執政者)라고 하더라도 한 번도 아첨을 하거나 억지로 미소를 짓지도 않았다. 기세를 부리고 교만하게 우쭐대는 자를 보면 그와 더불어 어울리는 것을 수치로 여겨서 피하였다. 비록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친구라고 할지라도 상대가 고관대작(高官大爵)이 되었으면, 그 사람이 자기를 찾아오는 경우가 아니고서는 자기가 먼저 찾아가지 않았다. 또한 집안 사람들이 복완(服玩)이나 기물(器物)을 절대로 화려하거나 사치하게 하지 않도록 늘 경계시켰다. 술을 마실 줄은 알았으나, 취하여 정신이 흐려질 정도로 마시지는 않았다. 서사(書史)를 아주 좋아하여 늙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전분제자(典墳諸子)로부터 패사소설(稗史小說)에 이르기까지 두루 섭렵하지 않은 책이 없었다.

그는 기억력이 남보다 뛰어나서 눈으로 한번 보면 모조리 외워버렸는데, 그 내용이 몇 권 몇째 줄에 있는지도 훤하게 기억하였다. 일찍이 소암(疎庵) 임숙영(任叔英)과 함께 과거 시험장에 들어가서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누군가 급히 『사문유취(事文類聚)』를 구하는 자가 있었다. 임숙영이 장난삼아, “여기에 두 부(部)가 와 있습니다.” 하니, 그 사람이 그 책을 보여 달라고 독촉하자, 임숙영이 웃으면서 조희진과 자기의 배를 가리키며, “여기에 있습니다.” 하였다. 실제로 그것은 허튼 말이 아니라, 두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문유취』를 모두 외우니, 책을 구하는 자가 깜짝 놀랐다고 한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충청도 진잠(鎭岑) 가수촌(嘉壽村)의 선영에 있으며, 둘째 부인과 합장하였는데, 이경석(李景奭)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백헌집(白軒集)』 권47) 첫째 부인 남양홍씨(南陽洪氏)는 좌랑(佐郞) 홍함(洪涵)의 딸이고, 둘째 부인 기계유씨(杞溪兪氏)는 첨정(僉正) 유대칭(兪大偁)의 딸이다. 자녀는 4남 4녀를 두었는데, 장남 조세형(趙世馨)은 음직(蔭職)으로 정5품상 통덕랑(通德郞)에 올랐고, 차남 조시형(趙時馨)은 진사(進士)에 합격하여 마전군수(麻田郡守)를 지냈다. 3녀는 사헌부 감찰(監察) 민회(閔晦)의 아내가 되었다. 차남 조시형의 아들 조성기(趙聖期)는 유명한 유학자인데, 그 문하(門下)에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등이 배출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백헌집(白軒集)』
■ 『청음집(淸陰集)』
■ 『일사기문(逸史記聞)』
■ 『구원집(九畹集)』
■ 『죽음집(竹陰集)』
■ 『백주집(白洲集)』
■ 『동토집(童土集)』
■ 『지수재집(知守齋集)』
■ 『동계집(東溪集)』

■ [집필자] 최양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