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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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일(趙希逸)

서지사항
항목명조희일(趙希逸)
용어구분인명사전
분야정치·행정가
유형인물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총론]
[1575년(선조8)∼1638년(인조16) = 64세]. 조선 중기의 선조∼인조 때의 문신. 자는 이숙(怡叔), 호는 죽음(竹陰)이다. 본관은 임천(林川)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동부승지(同副承旨)조원(趙瑗)이고, 어머니 전의이씨(全義李氏)는 병조 판서 이준민(李俊民)의 딸이다. 병조 좌랑 조응공(趙應恭)의 손자이고, 봉상시(奉常寺) 정(正) 조희진(趙希進)의 형이다. 6대가 연이어 대과(大科)에 급제하였고, 아버지와 그 아들의 3대가 연이어 진사시(進士試)에 장원 급제하였다.

[선조 시대 활동]
1601년(선조34) 진사시에 1등으로 장원 급제하자, 선조가 그의 시권(試卷)을 직접 보고서 크게 칭찬하였다. 이듬해 별시(別試)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저작(著作)에 보임되었다가, 승정원(承政院) 주서(注書)로 승진하였다. 그때 명(明)나라 사신이 조선에 오자, 서경(西坰) 유근(柳根)이 접반사(接伴使)가 되었고, 이어 그를 추천하여 종사관(從事官)으로 데려갔다. 그런데 그의 관품이 낮아서 선발 대상에 포함되지 못하니, 유근이 그를 승품(陞品)해 줄 것을 청하였고, 마침내 예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어, 국경으로 가서 중국 사신을 영접할 수 있었다. 1606년(선조39) 해운판관(海運判官)으로 나갔다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문학(文學)을 거쳐,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다. 1608년(선조41) 중시(重試)에 장원 급제하여, 다시 문명(文名)을 떨쳤다.

[광해군 시대 서궁 투서 사건]
1608년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호당(湖堂)에 들어가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형조 낭관(郎官) · 예조 낭관을 거쳐, 1610년(광해군2) 사헌부(司憲府)에 들어가서 헌납(獻納) · 지평(持平)을 역임하였다. 1612년(광해군4) 이조 좌랑에 임명되었다가, 1613년(광해군5) 이조 정랑(正郞)으로 승진하였다. 1616년(광해군8) 서궁(西宮)에 투서(投書)한 변고(變故)가 있었는데, 언문으로 쓴 투서에는 광해군의 죄악(罪惡)이 모조리 열거되어 있었으므로 광해군이 크게 노하였다. 이것은 허균(許筠)과 이이첨(李爾瞻) 등이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반대파를 숙청하기 위하여 조작한 사건으로, 그들은 글을 써서 투서한 사람으로 반대파 조희일을 지목하였다. 이어 1617년(광해군9) 이이첨의 심복으로 허균의 사주를 받은 그의 이종사촌 이위경(李偉卿)에 의하여 조희일은 죄를 뒤집어쓰고, 평안도 이산(理山)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그때 동생 조희진(趙希進)이 사건의 진상을 밝혀 형 조희일을 구원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1619년(광해군11) 사건의 전모가 밝혀져서 허균 일당은 복주(伏誅)당하고, 조희일은 유배생활에서 풀려나 병상의 노모를 만날 수 있었다. 아들을 만난 뒤에 어머니가 평안히 눈을 감자, 조희일은 동생 조희진과 함께 묘소 아래에서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고, 충청도 덕산(德山)으로 옮겨가서 은거(隱居)하였다.

[인조 시대 활동]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서 서인이 집권하자,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에 임명되어, 응교(應敎)로 승진하였고, 이어 사간원 사간(司諫)에 임명되었다, 의정부(議政府) 사인(舍人)을 거쳐 홍문관 전한(典翰)에 임명되었다가, 당하관(堂下官)으로서 승지(承旨)에 발탁되었다. 1624년(인조2) <이괄(李适)의 반란> 때 공주(公州)까지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였는데, 그 공으로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였다. 이어 광주목사(光州牧使)로 나갔다가, 1625년(인조3) 예조 참판(參判) · 병조 참판을 역임하였다. 병조 참판으로 있을 때 그는 군포(軍布)의 폐단을 지적하고 개혁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627년(인조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어가(御駕)를 강화도(江華島)까지 호종(扈從)하였고, 1628년(인조6) 담양부사(潭陽府使)에 나가서 부당하게 징수한 세곡(稅穀) 5천 곡(斛)을 견감(蠲減)하거나 면제(免除)하니, 고을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다시 예조 참판에 임명되어, 접반사(接伴使)로서 평안도 가도(椵島)에 가서 모문룡(毛文龍)을 접대하였다. 당시 모문룡이 은밀하게 그에게 함께 손을 잡고 가도의 무역 이익을 나누자고 제안하였으나, 그는 단호히 거절하였다. 모문룡은 누르하치[奴兒哈赤]가 요동(遼東)을 점령할 때 명(明)나라 패잔병을 이끌고 평안도 가도에 들어온 인물로, 함께 손을 잡고 청(淸)나라를 공격하자고 조선에 제안하였다. 그러면서 가도에 거주하였는데, 실제로는 조선에 군량미를 요구하며 온갖 횡포를 부렸다. 1630년(인조8) 형조 참판을 거쳐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나갔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서 인조가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청나라 군사와 싸우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군민(軍民)들을 모집하여 달려가려고 하다가, 양국 사이에 화의가 성립되어 그만두었다. 전쟁이 끝난 다음에, 인조가 그에게 삼전도비(三田渡碑)의 글을 짓게 하였는데, 그는 이를 사양하다가 조잡하게 글을 지어 바쳐서 그 책임을 면하였다. 1638년(인조16) 7월 갑자기 병을 얻어서 8월 20일에 죽었는데, 향년이 64세였다.

저서로 『경사질의(經史質疑)』가 남아 있고, 문집으로 『죽음집(竹陰集)』이 있다.

[성품과 일화]
조희일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신장이 크고 체격이 우람하였다. 태어날 때부터 정수리에 연꽃과 같은 가마가 있었다. 어려서 가정의 교훈을 깊이 가슴에 새기고 실천하여, 그 재주와 명망이 같은 또래 아이들보다 한결 뛰어났다. 1601년(선조34) 진사시에 장원 급제하였는데, 그의 아버지 조원과 그의 아들 조석형(趙錫馨)도 진사시에 장원 급제하여 ‘3대 장원 급제’ 집안으로도 유명하였다. 또 조희일은 부(賦)도 잘 짓고 글씨도 잘 써서 송(宋)나라 소식(蘇軾)과 똑같다고 하여, 사람들이 그를 ‘조적벽(趙赤壁)’이라고 불렀다. 그가 젊었을 때 선조가 글씨를 쓰지 않은 병풍[素屛] 하나를 만들어서 글씨 잘 쓰는 사람을 골랐다. 그때 석봉(石峰) 한호(韓濩)와 남창(南窓) 김현성(金玄成)은 모두 몸을 사리고 글 쓰는 것을 사양하였다. 그러나 조희일은 어명을 받고 글씨를 써서 올렸고, 이에 선조가 매우 흡족하여 말하기를, “그 아버지 조원의 필체가 굳세고 힘차지만, 지금 그 아들이 아버지보다 훨씬 낫구나.”라고 하였다. 이렇게 글 쓰는 것이 뛰어났던 그는 1626년(인조4)에 계운궁(啓運宮) 인원왕후(仁元王后)의 지석(誌石)을 쓰기도 하였다.

조희일은 서적(書籍)이라면 탐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그는 서적을 탐독할 때 반복하며 숙독(熟讀)하였으므로 앉아서나 누워서나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소리 내어 읽었다. 비복(婢僕)들이 그의 글 읽는 소리에 맞춰 서로 절구질하고 콧노래를 부를 정도였다. 1637년(인조15) 11월 청나라 황제 홍타지(皇太極)의 요청에 따라 삼전도(三田渡)에 청나라의 승전비(勝戰碑)를 세우게 되었는데, 인조가 당대의 문장가 장유(張維) · 이경전(李慶全) · 조희일 · 이경석(李景奭)을 불러서 삼전도 비문을 짓게 하였다. 장유 등이 모두 상소하여 글짓기를 사양하였으나, 인조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마침 이경전은 병 때문에 글을 짓지 못하였으므로, 나머지 세 사람은 마지못하여 글을 지어 바쳤다. 조희일은 일부러 글을 엉터리로 조잡하게 지어 바쳐서 채택되지 않기를 바랐으므로, 마침내 이경석의 글이 채택되었다. 송시열(宋時烈)은 조희일의 「비명(碑銘)」에서, “그가 삼전도(三田渡) 비문(碑文)을 짓지 않겠다고 사양하여 면하였다”고 하고, 또 칭찬하기를, “이것은 그가 지조를 지키는 것이 확고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였으나, 후일 이경석의 후손들은 이것이 비문을 지은 이경석을 상대적으로 욕하는 것이라고 하여 송시열을 비난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처음에 경기도 고양(高陽)의 선영(先塋)에 있었으나, 나중에 경기도 파주(坡州) 혜음리(惠陰里)의 자리로 옮겼는데,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 첫째 부인 정씨(鄭氏)는 해림부원군(海林府院君) 정승휴(鄭承休)의 손녀이고, 둘째 부인 심씨(沈氏)는 부사(府使) 심신겸(沈信謙)의 손녀이다. 자녀는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 조석형(趙錫馨)은 사마시(司馬試)에 장원 급제하였으나 대과에는 급제하지 못하였다. 증손자 조정만(趙正萬)은 진사시에 장원 급제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 판서를 지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보감(國朝寶鑑)』
■ 『송자대전(宋子大典)』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청음집(淸陰集)』
■ 『상촌집(象村集)』
■ 『응천일록(凝川日錄)』
■ 『택당집(澤堂集)』
■ 『계곡집(谿谷集)』
■ 『성소복부고(惺所覆瓿藁)』
■ 『임하필기(林下筆記)』
■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 [집필자] 최양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