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총론]
[1555년(명종10)∼1612년(광해군4) = 58세]. 조선 중기 선조~광해군 때의 문신. 자는 경지(景至), 호는 풍옥헌(風玉軒) · 만귀(晩歸)이다. 본관은 풍양(豊壤)이고, 주거지는 경기도 과천(果川)이다. 아버지는 홍문관 응교(應敎)조정기(趙廷機)이며, 어머니 진주강씨(晉州姜氏)는 관찰사(觀察使)강욱(姜昱)의 딸이다. 홍문관(弘文館)전한(典翰)조종경(趙宗敬)의 손자이고, 서화인(書畵人) 조속(趙涑)의 아버지이다.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인(門人)이다.
[선조~광해군 시대 활동]
1579년(선조1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음직(蔭職)으로 경기전(慶基殿)참봉(參奉)과 선릉(宣陵)참봉(參奉)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서 실직하였다가 1593년(선조26) 선공감(繕工監) 감역(監役)에 임명되었는데, 곧바로 해직되었다. 1601년(선조34)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고, 1604년(선조37) 한성부참군(漢城府參軍)으로 승진하였다. 1605년(선조38) 대흥현감(大興縣監)에 임명되었다가, 1607년(선조40) 파직되었다.
1609년(광해군1) 호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었으나, 1610년(광해군2) 사헌부(司憲府)에서 “호조 좌랑 조수륜은 일 처리가 서툴러서 일이 많은 때에 직임을 감당하기가 어려우니, 체직하소서.”라고 탄핵하여 파직되었다. 1611년(광해군3) 평택현감(平澤縣監)에 임명되었는데, 1612년(광해군4) 그가 선정을 베푼다고 충홍도관찰사(忠洪道觀察使) 박이서(朴彝敘)가 장계를 올렸다. 이조에서 이에 대하여 회계(回啓)하기를 “평택현감 조수륜은 인자하게 백성을 잘 다스리니, 마땅히 포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일이 은전(恩典)에 관계되니, 주상께서 재량하여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광해군이 조수륜을 승진시켜 서용하라고 전교하였다.
그 해 신율(申慄)이 황혁(黃赫)과의 구원(仇怨)으로 인하여 역옥(逆獄)을 일으켰는데, 조수륜은 황혁의 처조카였으므로, 사건에 연루되어 옥중에서 심문을 받았다. 그러던 가운데 권필(權韠)이 지은 「궁류시(宮柳詩)」가 그의 집에서 발견되었는데, 그 시가 광해군의 처남 유희분(柳希奮) 일당을 풍자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져서, 지은이 권필 뿐만 아니라 조수륜도 참혹한 형벌을 받고 죽었다. 그 때가 1612년(광해군4) 4월 3일이었는데, 향년이 58세였다.
[궁류시 사건]
광해군의 왕비 유씨(柳氏)의 형제인 유희분 일당은 임금의 은총을 믿고 방자하게 행동하여 주위로부터 많은 원망을 받았다. 그리하여 1611년(광해군3) 소암(疎庵) 임숙영(任叔英)이 광해군에게 정대(庭對)하여 그들을 심하게 나무랐는데, 유희분 일당이 그를 미워하여 그의 관직을 삭탈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권필은 개연히 「궁류시」를 써서 이를 풍자하였다. 그 시를 읽어본 여러 유씨들이 광해군에게 하소연하여 광해군은 매우 화가 났다. 그러나 귄필을 잡아서 다스릴 꼬투리를 찾지 못하였다.
그 뒤에 1612년(광해군4) 3월 신율이 황혁과의 구원으로 인하여 역옥을 무고(誣告)하였다. 이때 조수륜은 황혁의 처조카였으므로, 조수륜도 연루되어 감옥에 들어가고, 그 집안이 수색을 당하였다. 그때 광해군은 <무고의 옥사>에 관련된 서류를 점검하고, 옥사에 연루된 자들의 집안에서 서적들을 모두 가져다가 뒤져 보다가, 우연히 조수륜의 집안에서 가져온 책 속에서 「궁류시」를 발견하였다.(『송자대전(宋子大全)』 권172 「석주권공묘갈명(石洲權公墓碣銘」 참조)
그리하여 광해군은 조수륜을 직접 국문하면서 누가 그 시를 지었는지, 또 그가 황혁에게 보낸 편지의 글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등을 힐문(詰問)하였다. 조수륜이 황혁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정소(鄭疏)’ 때문에 인심이 흉흉했는데 ‘유상(柳相)’이 진압하여 가까스로 의논이 정해지기는 했으나, 논의가 갖가지로 나오고 있으니, 이러는 사이에 반드시 큰 일이 있게 될 것 같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공성(恭聖)’으로 추숭(追崇)한 것에 대해 남인(南人)들은 사특한 의논이라고 지적하고, 어떤 사람들은 임금을 나쁘게 만들고 있다고 하기도 합니다.” 하였다. 여기서 ‘공성으로 추숭한 것’은 광해군의 어머니인 공빈김씨(恭嬪金氏)를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숭한 것을 말하는데, 다른 어떤 것보다도 이 글귀에 광해군은 몹시 화를 내었다.
그래서 광해군이 증오하여 힐문하니, 조수륜은 “정(鄭)과 유(柳)라고 말한 것은 정인홍(鄭仁弘)이 상소하여 유영경(柳永慶)을 논박하였을 적에 유영경이 정인홍에게 죄를 준 때의 일입니다. 추숭할 때는 조정의 의논이 혹은 그르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남인들도 그렇게 말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우연히 써서 황혁에게 통보한 것입니다.”라고 공초하였다.
광해군이 “사특한 의논이라느니, 임금을 나쁘게 만든다는 등의 말은 범연한 이야기가 아니다. 어느 곳에서 들었는가? 남인은 누구인가? 반복하여 철저히 신문하라.” 하였으나, 조수륜이 아무런 대답이 없다가 결국 말하기를, “김륵(金玏)이 그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하였다. 좌우에서 광해군에게 아뢰기를, “김륵이 대간으로 있던 때는 이미 추숭이 끝난 뒤입니다.” 하니, 조수륜이 말하기를, “정신이 가물거려 잘 기억이 나지를 않습니다. 단지 김륵이 이로써 피혐한 때의 일이라는 것이 기억났기 때문에 망령되이 끌어대었습니다.”하였다. 결국 조수륜에게 준형(准刑)을 가하였으나 자복하지 않고 죽었다.
[성품과 일화]
조수륜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천성이 총명하고 영특하여 어려서부터 식견(識見)이 특출하였고, 가정에서 글을 배워 이미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알았다. 자란 뒤에는 우계 성혼에게 글을 배웠는데, 겸손하고 독실하여 몸가짐을 경건하게 하고 남을 성의로써 대하였다.
어린 나이에 부친을 여의고 복상(服喪)하는 일을 예제(禮制)보다 지나치게 슬퍼하는 바람에 결국은 중병(重病)에 걸렸다. 홀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하였으나, 자신을 봉양하는 데에는 겨울과 여름에 입는 옷 한 벌과 아침과 저녁으로 먹는 한 끼 밥조차도 오히려 분에 넘치는 부끄러운 일로 여겼다. 집에서 지낼 때에는 반듯하게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단정하게 앉아서 종일토록 공경한 태도로 보냈다. 성혼의 문하에서 행실이 단아함으로써 명성을 얻었으며, 경학에도 조예가 깊어서, 그가 집무하는 관아에서 여러 동문들과 함께 성혼의 『우계집(牛溪集)』을 편집하여, 출간하였다.
그는 일찍이 서호(西湖)의 별장(別莊)에다 작은 집을 한 채 짓고 ‘풍옥헌(風玉軒)’이라는 편액(扁額)을 붙였다. 1607년(선조40) 대흥현감에서 파직당하여, 집으로 돌아온 후 그곳에다 서너 칸의 초가집을 더 지어서 ‘만귀(晩歸)’라는 편액을 붙이고, 노년을 여기에서 보내다가 여생을 마치려고 계획하였다. 그러나 모친을 봉양하기 위하여 두 번 고을에 부임하는 바람에 그 뜻을 끝내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동쪽 광암리(廣巖里)의 선영에 있고, 부인이 왼쪽에 묻혔는데, 명재(明齋) 윤증(尹拯)이 지은 묘갈(墓碣)이 남아 있다.(『명재유고(明齋遺稿)』 권40) 죽은 뒤에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서천의 건암서원(建巖書院)에 제향되었다. 부인 동래정씨(東萊鄭氏)는 현감 정선복(鄭善復)의 딸이고 좌찬성(左贊成)정대년(鄭大年)의 손녀인데, 자녀는 3남 3녀를 두었다. 장남 조척(趙滌)은 효자로 정려(旌閭)가 세워졌고, 3남 조속(趙涑)은 조선조 중기를 대표하는 서화인(書畵人)이며, 차녀는 참의(參議)이덕수(李德洙)의 아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