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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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기(趙聖期)

서지사항
항목명조성기(趙聖期)
용어구분인명사전
분야학자, 교육·언론인
유형인물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총론]
[1638년(인조16)∼1689년(숙종15) = 52세]. 조선 중기 현종∼숙종 때의 유일(遺逸). 자는 성경(成卿), 호는 졸수재(拙修齋)이다. 본관은 임천(林川)이고, 주거지는 서울이었다. 아버지는 마전군수 조시형(趙時馨)이고, 어머니 청송심씨(靑松沈氏)는 참의(參議) 정양(廷揚)의 딸이다. 봉상시(奉常寺) 정(正) 조희진(趙希進)의 손자이고, 판서 조정만(趙正萬)의 7촌이다.

[은거 생활]
어려서부터 큰 뜻을 품고서 옛 성현(聖賢)처럼 되겠다고 다짐하였으나, 본래 몸이 약하여 병에 시달려 학문에 각고(刻苦)하지 못하고, 오직 사색(思索)하고 궁리(窮理)하기만을 일삼았다. 부모의 권유로 과거에 응시하였는데, 여러 번 향시(鄕試)에는 합격하였으나, 대과(大科)에는 실패하였다. 얼마 뒤에 고질병으로 인하여 과거 공부를 포기하였고, 이후 방 안에 틀어박혀 30여 년간 경학(經學)을 깊이 연구하였다.

경사(經史)에 박식하여 두루 정통하지 않음이 없었으므로, 당시 ‘도하(都下)의 처사(處士)’라고 일컬었다. 대사헌 임영(林泳)과 판서 김창협(金昌協) · 김창흡(金昌翕) 형제 등이 그와 교유하여 그 명성이 점차 높아졌다. 궁벽한 마을에서 문을 닫고 은거한 지 오래 되었으나, 재주 있는 선비와 어진 사람들이 끊임없이 찾아와서 학문을 토론하였다. 그가 입을 열면 언제나 횡설수설(橫說竪說)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모두 이치에 맞아서 사람들이 감히 그를 비난하지 못하였다. 질문하는 자가 있으면 응답하기를 물 흐르듯이 하여 막힘이 없었고, 문장을 짓는 것이 잠시 사이에 만여 마디의 글자를 구사하였다. 1689년(숙종15) 11월 21일 병으로 죽었는데, 향년이 52세였다.

문집으로 『졸수재집(拙修齋集)』이 있고, 한문 소설로 『창선감의록(彰善感義錄)』이 남아 있다.

[학문적 세계]

조성기(趙聖期)의 학문은 송(宋)나라 소옹(邵雍)을 본받아서 선현(先賢)의 가르침을 그대로 답습하기보다 스스로 사색(思索)하고 탐구(探究)하는 것을 중시하였다. 때문에 자기만이 터득한 묘리(妙理)가 많았다. 김창흡이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에 대하여 그에게 물으니, 그는 “화담은 전일(專一)하고 퇴계는 주밀(周密)하다. 화담은 수(數)의 한쪽만을 보고 이(理)의 전체에는 어두우니, 이것이 화담이 퇴계에 미치지 못하는 점이다.”고 말하였다. 이어서 퇴계의 심오한 학문의 경지를 받아들일 것인지를 묻자, 그는 웃으면서 말하기를, “나는 나와 더불어 주선(周旋)한 지가 오래 되었다.”고 하였다.(『삼연집(三淵集)』 권27 「졸수재조공묘지명(拙修齋趙公墓誌銘)」 참조)

그는 퇴계 이황과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사단칠정(四端七情)과 인도이기설(人道理氣說)을 비교하여, 자기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사칠변(四七辨)」을 지었다. ‘사칠(四七)’이란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이고, ‘변(辨)’은 이발(理發)과 기발(氣發)의 논변(論辨)을 말한다. 조선 시대 유학사에서 이기설(理氣說)과 사칠변(四七辨)에 대하여 제가(諸家)의 학설이 다른데, 퇴계 이황과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이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이 논쟁이 시작되었다. 그 뒤 우계(牛溪) 성혼(成渾)은 퇴계의 학설을,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고봉의 학설을 받아들여, 각자 새로운 주장을 내놓았다.(『홍재전서(弘齎全書)』 권179 참조)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유학자들은 제가(諸家)의 주장을 모아서 책으로 엮으면서 자기의 견해를 제시하였다. 그 또한 「사칠변」에서 ‘본연명물(本然命物)’ · ‘승기유행(乘氣流行)’ · ‘혼융합일(渾融合一)’ · ‘분개각주장(分開各主張)’의 자기 설(說)을 가지고 이기설을 설명하며, 율곡의 「사칠변(四七辨)」을 비판하였다. 그는 율곡의 「사칠변」을 3년 동안 감정(戡定)하고 연구한 끝에 비로소 그 잘못된 점을 발견하여 비판한 것인데, 다수의 노론(老論) 학자들로부터 미친 사람으로 취급 받았다.

[성품과 일화]
조성기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용모는 남들의 눈에 띄지 않게 평범하게 생겼으나, 눈동자는 번개와 같은 섬광이 광채를 뿜었고, 큰 입은 말이 나오는 대로 지껄이더라도 마치 큰 바다에 물결이 출렁이는 것과 같았다. 어려서부터 장난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마치 어른처럼 의젓하게 행동하였다. 또한 자제들을 대할 때에는 부지런히 타이르고 예절을 엄격하게 지켜서, 규문(閨門) 안이 마치 조정(朝廷)처럼 엄숙하였고, 매사에 벼릿줄을 들어 올리듯이 순리대로 처리하였다. 남의 조그마한 재주와 장점이라도 있으면 입에 올려 칭찬하기를 아끼지 않아서, 상대로 하여금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취하도록 하였다. 날씨가 좋거나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면 빈객(賓客)을 초청하여 경서(經書)를 담론하고 술잔을 주고받았다.

삼연(三淵) 김창흡이 그를 존경하여, 그가 살았을 때에는 자주 찾아가서 이기설과 사칠변에 관하여 많은 토론을 하였다. 그리고 그가 죽었을 때에는 그를 추모(追慕)하는 만사(挽詞)를 지은 후, 그 묘지명을 지어서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겼다. 김창흡이 그 문인들에게 “아깝다. 그대들이 미처 졸수재(拙修齋)를 보지 못하였으니, 한 번 보았더라면 정말로 좋았을 것을.”이라 말하였다. 졸수재는 조성기가 스스로 붙인 호(號)인데, 운이 나빠서 출세하지 못하고 학문만을 닦는 자신을 나타내고 있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수원(水原)의 건달산(乾達山) 언덕에 있는데, 부인과 합장하였다. 김창흡이 지은 묘지명이 남아 있다. 부인 이씨(李氏)는 도사(都事)이상원(李尙元)의 딸인데, 그보다 20년 먼저 죽었다. 자녀는 2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통덕랑(通德郞) 조정유(趙正儒)이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졸수재집(拙修齋集)』
■ 『창선감의록(彰善感義錄)』
■ 『삼연집(三淵集)』
■ 『홍재전서(弘齎全書)』
■ 『한수재집(寒水齎集)』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열하일기(熱河日記)』
■ 『삼연집(三淵集)』
■ 『극재집(克齋集)』
■ 『연암집(燕巖集)』
■ 『성호전집(星湖全集)』
■ 『대산집(臺山集)』

■ [집필자] 최양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