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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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석윤(趙錫胤)

서지사항
항목명조석윤(趙錫胤)
용어구분인명사전
분야정치·행정가
유형인물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총론]
[1605년(선조38)∼1655년(효종6) = 51세]. 조선 중기 인조∼효종 때의 문신. 자는 윤지(胤之), 호는 낙정재(樂靜齋)이다. 본관은 배천(白川)이고, 서울 근교 금천(衿川: 시흥) 출신이다. 아버지는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조정호(趙廷虎)이고, 어머니 청송심씨(靑松沈氏)는 군수(郡守) 심은(沈訔)의 딸이다. 계곡(谿谷) 장유(張維) ·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문인이다. 청백리(淸白吏)에 뽑혔다. 좌의정 민정중(閔鼎重)의 고모부이다.

[인조 시대 활동]
1623년(인조1)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과장(科場)에 나가서 1624년(인조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다. 1626년(인종4) 별시(別試)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으나 파방(罷榜)되었다. 1628년(인조6) 나이 23세로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사서(司書)에 보임되었다.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다가 옥당(玉堂: 홍문관)에 들어가서, 1629년(인조7)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고, 이듬해 사헌부(司憲府) 헌납(獻納)에 임명되었으나, 모친상을 당하였다. 1632년(인조10) 홍문관 수찬(修撰)을 거쳐 이조 정랑(正郞)에 임명되어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1635년(인조13) 홍문관 교리(校理)에 임명되었는데, 관학(館學)의 유생(儒生)들이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우계(牛溪) 성혼(成渾)을 성묘(聖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요청하였을 때, 그는 유생들의 주장을 지지하여 극력 변론하였다.

1636년(인조14) 청(淸)나라가 보내온 모욕적인 글을 배척하고 척화(斥和)를 주장하다가, 영남(嶺南) 지방에 가서 군사(軍士)를 점고(點考)하였다. 얼마 뒤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 인조가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가서 청나라 군사와 싸운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러 군영(軍營)의 군사들을 징발하여 관군을 지원 독려하였으나 관군은 청나라 군사에게 거듭 패배하여 후퇴하였다. 청나라와 강화(講和)가 성립되자, 지난날 척화를 주장한 사람들이 국사를 그르쳤다고 반성하고 자신이 먼저 벌을 받겠다고 자청하였으나 인조가 윤허하지 않았다.

1637년(인조15) 이조 정랑에 임명되었고, 홍문관 응교(應敎)를 거쳐, 사헌부 집의(執義)로 전임되었다. 1638년(인조16) 진주목사(晉州牧使)로 나갔는데, 선정을 베풀어 진주 사람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 곳에다 세워서 그를 칭송하였다. 1639년(인조17) 의정부(議政府) 사인(舍人)이 되어 사신(使臣)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 심양(瀋陽)에 다녀왔다. 1640년(인조18) 심양에 볼모로 있던 소현세자(昭顯世子)가 본국으로 돌아올 적에 청나라의 요구대로 원손(元孫)을 대신 볼모로 보내는 것을 적극 반대하였다. 1641년(인조19) 사간원 사간(司諫)에 임명되었다가, 외직으로 나가서 안변부사(安邊府使)가 되었다. 1643년(인조19) 홍문관 전한(典翰)에 임명되었다가, 병조 참의(參議)로 옮겼다.

1644년(인조22)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었고, 아버지 조정호가 호서(湖西) 지방에 우거(寓居)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원하여 공청도관찰사로 나갔으며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다. 1645년(인조23)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에 임명되었다가, 우승지(右承旨)로 발탁되었고, 이조 참의로 전임되었다. 1646년(인조24)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되었는데, 이듬해 부친상을 당하여 3년 상례를 치르던 중인 1649년(인조27) 인조가 승하하였다. 그러자 그는 궐하(闕下)에 달려가서 곡(哭)하고 참최복(斬衰服)을 겸하여 입었다.

[효종 시대 활동]
부친상이 끝나자, 1650년(효종1)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는데, 그때 청음 김상헌과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이 조정에서 효종을 보좌하고 있었다. 또한 효종이 한창 개혁 정치를 도모하고 있었으므로, 여러 가지 정책을 건의하여 ‘충직(忠直)한 신하’라는 칭찬을 받았다. 내수사(內需司)의 폐단을 언급하고 이부(吏部)와 승정원으로 하여금 주관하게 할 것, 또 궁가(宮家)명전(名田)에 대한 면세(免稅)를 혁파하며 산택(山澤)을 사사로이 점유하는 일을 금지할 것 등을 청하였다. 성균관 대사성에 전임되었다가,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이에 앞서 유계(兪棨)가 인조(仁祖)의 묘호(廟號)를 논하다가 효종의 엄중한 견책(譴責)을 받게 되었는데, 그는 상소하여 이를 변명하였다.

1650년(효종1) 조정에서 『인조실록(仁祖實錄)』을 편찬하기 시작하면서, 대제학이 그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효종이 김상헌에게 대제학을 추천하게 하니, 2품 이상으로는 그만한 인물이 없다고 하며, 정3품의 부제학 조석윤 한 사람을 추천하였다. 이에 특별히 자급(資級)을 2품으로 승진하고 홍문관 · 예문관의 양관(兩館)의 대제학에 임명하였다. 이리하여 후일 그는 죽은 뒤에 2품 이상 대신에게만 주는 시호(諡號)를 받게 되었다.

다시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는데, 그 때 효종이 유계를 가죄(加罪)하라고 명하자, 그는 유계를 신구(伸救)하려고 소장(疏章)을 여섯 차례나 올렸다. 그러자 효종이 “경이 지조를 지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으나, 내가 경을 그냥 놓아두지 못하겠다는 생각도 더욱 깊어진다.” 하였다. 또 공주의 혼례가 마침 인조의 소상(小祥)과 겹치는 시기라고 하여 그가 그 불가함을 강력히 고집하였다. 효종이 두세 번 유지를 내려 부탁하였으나 그는 끝내 따르지 않아 혼사가 마침내 거행되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일을 겪자 효종은 그를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다.

병조 · 예조의 참판(參判)을 거쳐 1651년(효종2) 다시 양관 대제학에 임명되었다가, 사간원 대사간과 사헌부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효종이 능행(陵幸)할 때 호종(扈從)하는 사람들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경기도관찰사에게 그가 가벼운 형률을 적용하려고 하였다. 효종이 매우 진노하여 그를 대사헌에서 파직하고 전라도 부안(扶安)으로 귀양 보냈다.

1652년(효종3) 다시 소환하여 실록(實錄)을 수찬하는 일을 맡겼으나, 그는 “인사권(人事權)을 맡은 사람이 인망(人望)이 있는 자가 아니다.”고 하였다. 그러자 효종은 그가 다른 당파의 사람을 공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멀리 강계(江界)로 귀양 보냈다. 사면(赦免)을 받고 다시 기용되어 이전의 관직에 복직되었는데, 1653년(효종4)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었고, 또 대사헌으로서 대사성을 겸임하였다. 서원리(徐元履)와 뜻이 맞지 않아 서로 다투다가 종성부사(鐘城府使)로 좌천되었다. 좌의정 이시백(李時白) 등의 건의로 중추부(中樞府) 동지사(同知事)로 전임되어 북쪽 변방에서 돌아오다가, 병약한 몸으로 그 여정을 견디지 못하고 1655년(효종6) 8월 초2일에 객사(客死)하였는데, 향년이 51세였다.

저서로는 『낙정집(樂靜集)』이 있다.

[성품과 일화]
조석윤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용모가 단정하고 성품이 온화하였으므로, 사우(士友)들이 그의 조용한 성격을 보고 ‘낙정(樂靜)’이라는 호(號)를 붙여주었다. 일찍부터 시문(詩文)에 뛰어나서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인봉(麟鳳: 기린과 봉황새)’이라 부렀다. 그가 지은 시문(詩文)을 다투어 표절(剽竊)해 갔지만, 그는 조금도 개의하지 않았다. 평소에 그는 과묵하고 신실(信實)하여 말과 웃음이 적었다. 개결(介潔)하면서도 과격하지 않고 화평하면서도 무리에 휩쓸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마음과 뜻이 안정되어 있어서 자기를 과시하거나 화를 내는 일이 전혀 없었다. 또한 비록 상대가 나이가 어리거나 아랫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듣기 싫은 소리로 욕하거나 나무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임금에게 간쟁(諫爭)할 적에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목숨을 내걸고 자기 주장을 관철시켰다. 조정에서 논의가 엇갈려서 아무리 반대파와 격렬한 논쟁을 벌인 뒤라고 하더라도 끝내 상대편의 흠결(欠缺)을 단 한 가지라도 들춰내어 말한 적이 없었다. 조정에서 벼슬할 때에 그의 논리는 간단명료하였으며 또한 절대 공언(空言)하지 않았다. 향리(鄕里)에 있을 때에는 나라의 정령(政令)의 잘 되고 잘못된 것과 인물의 옳고 그름을 일절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는 일찍부터 실학(實學)에 뜻을 두어 평생 동안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주로 경전(經傳)을 많이 연구하였는데, 만년에는 정주학(程朱學)의 여러 서적들을 좋아하였다. 사우들과 고서(古書)를 토론하고 그 이치를 분석하여 결론을 내릴 때에는 마치 자기 몸의 고질병 하나를 고친 것처럼 기뻐하였다. 그는 후학들을 가르쳐서 성취(成就)시킨 사람들이 많았다. 그가 문인(門人)에게 이르기를, “학문을 하는 데에는 다만 아는 것과 행하는 것 두 가지뿐인데, 행하기가 더욱 어렵다. 알면서도 행하지 못한다면 이것은 모르는 것과 같다.” 하였고, 또 “도(道)는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않다. 다만 일상적인 생활 속에 있다.” 하였다.

[시호와 자손]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비명(碑銘)이 있다. 죽은 뒤에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고, 금천(金川)의 도산서원(道山書院), 안변의 옥동서원(玉洞書院), 종성의 종산서원(鍾山書院)에 제향되었다. 부인 여흥민씨(驪興閔氏)는 부윤(府尹)민기(閔機)의 딸로, 5녀를 두었다. 장녀는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의 아들 송광훈(宋光勳)의 아내가 되었고, 차녀는 홍운관 교리(校理) 이헌(李藼)의 아내가 되었고, 4녀는 사간원 정언(正言) 심유(沈濡)의 아내가 되었다. 아들이 없는 관계로 그는 4촌 동생 조석조(趙錫祚)의 아들 조윤(趙惀)을 양자로 삼았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낙정집(樂靜集)』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송자대전(宋子大典)』
■ 『임하필기(林下筆記)』
■ 『약천집(藥泉集)』
■ 『포저집(浦渚集)』
■ 『서계집(西溪集)』
■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 『잠곡유고(潛谷遺稿)』
■ 『속잡록(續雜錄)』
■ 『청음집(淸陰集)』
■ 『한수재집(寒水齋集)』
■ 『우계집(牛溪集)』
■ 『읍취헌유고(挹翠軒遺稿)』
■ 『응천일록(凝川日錄)』
■ 『청성잡기(靑城雜記)』
■ 『혼정편록(混定編錄)』

■ [집필자] 최양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