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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27년(세종9)∼1497년(연산군3) = 71세]. 조선 초기 문종~연산군 때의 문신. 자는 경보(敬甫), 호는 물재(勿齋) · 칠휴거사(七休居士)이다. 본관은 평해(平海)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손밀(孫密)이고, 어머니 횡성조씨(橫城趙氏)는 정선군사(旌善郡事) 조온보(趙溫寶)의 딸이다. 장령(掌令) 신정리(申丁理)의 문인이다.
[문종~세조 시대 활동]
1451년(문종1) 생원시(生員試)에서 1등으로 장원급제하였고, 1453년(단종1) 27세로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경창부(慶昌府) 승(承)에 임명되었고, 1454년(단종2) 사헌부 감찰(監察)이 되었다가, 승문원 부교리(副校理)로 옮겼다. 1457년(세조3) 중시(重試)에 정과로 급제하여, 종5품하 봉훈랑(奉訓郞)으로 승품(陞品)하고 병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1459년(세조5) 성균관 직강(直講)에 임명되어,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를 겸임하였다. 1460년(세조6) 부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상례를 치렀다. 1462년(세조8) 형조 정랑에 임명되었는데, 세조가 문사(文士) 중에 학술이 있는 자를 선발하자, 도승지 홍응(洪應)이 그를 추천하여 예문관(藝文館)응교(應敎) ·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그때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경서(經書)를 친강(親講)하고, 또 한 달에 2번씩 부시(賦詩)하였다. 1464년(세조10) 모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끝마치고 1466년(세조12)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다가, 홍문관 전한(典翰)을 거쳐, 사헌부 집의(執義)에 전임되었는데, 춘추관 편수관(編修官)을 겸임하였다.
[성종 시대 활동]
1470년(성종1) 성종이 즉위하자, 다음해 시정(時政)에 관한 17조목(條目)을 상소하였는데, 성종이 가납(嘉納)하고 특별히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陞品)하여 형조 참의에 임명하였다. 그해 『세조실록(世祖實錄)』수찬관(修撰官)에 임명되어, 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472년(성종3) 상호군(上護軍)으로 전임되자, 남산(南山) 밑에 초정(草亭)을 짓고 못을 파서 연꽃을 심고 날마다 후학들을 모아서 글을 가르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1474년(성종5) 장례원(掌隸院) 판결사(判決事)가 되었고, 이듬해 예문관 부제학(副提學)에 임명되어, 경연 참찬관(參贊官)을 겸임하였다. 1476년(성종7)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어,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승진하였으나, 도승지(都承旨) 현석규(玄碩奎)와 서로 맞지 아니하여 형조 참의로 옮겼다. 1478년(성종9) 좌승지(左承旨)에 임명되었다가 도승지로 영전되었고, 강원도관찰사로 나갔다. 이듬해 성종이 중궁(中宮) 윤씨(尹氏)를 폐비(廢妃)시킬 때, 후환을 경고하고 극력 이에 반대하였다. 호조 판서에 임명되었다가 1480년(성종11) 형조 판서로 승진되었고, 하정사(賀正使)로서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이듬해 경기도관찰사로 나갔다가 공조 판서에 임명되었는데, 세자 좌빈객(左賓客)을 겸임하여 세자 때의 연산군을 가르쳤다. 1483년(성종14)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고, 특별히 종1품하 숭정대부(崇政大夫)로 가자(加資)되었다. 이듬해 중추부 지사 겸 의금부 판사에 임명되었다가, 한성부 판윤(判尹)을 거쳐,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1485년(성종16) 의정부 좌참찬(左參贊)에 임명되었는데, 그때 임사홍(任士洪)의 일을 두둔하다가 파직되었다. 그러나 곧바로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는데, 선정을 베풀었고 의원(醫員) 전순의(全循義)가 편찬한 『식료찬요(食療撰要)』를 보충하여 간행하기도 하였다. 1487년(성종18) 의정부 우찬성(右贊成)에 임명되어, 세자 이사(貳師)를 겸임하였다. 다음해 노비 추쇄 수개 도감(奴婢推刷修改都監)의 제조(提調)가 되어 수개안(修改案)에서 밝혀낸 공천(公賤) 2천여 명을 찾아내어 나라에 바쳤다. 1490년(성종21) 중추부 판사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어세겸(魚世謙) · 노공필(盧公弼) · 신승선(愼承善) 등과 함께 4소대장(四所大將)을 맡았다. 1492년(성종23) 병으로 관직을 사임하였으나, 성종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연산군 시대 활동과 그의 학문]
1495년 연산군이 즉위하자, 대간(臺諫)에서 간언한 일이 연산군의 뜻을 거슬러 대간의 관원들이 하옥(下獄)되었다. 그가 병중에 그 불가함을 상소하자 연산군은 손순효를 스승이라고 하여 존경하고, 그 간언을 받아들였다. 1496년(연산군2) 정년(停年)인 70세가 되었다고 하여 치사(致仕)하였으나, 연산군이 허락하지 않고,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 1497년(연산군3) 3월 20일 병이 위독해져서 죽으니, 향년이 71세였다.
그는 학문에 조예가 깊고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하였다. 그 중에서 『중용(中庸)』 · 『대학(大學)』 · 『주역(周易)』에 더욱 조예가 깊었는데, 항상 『중용』과 『대학』을 후학들에게 권장하였다. 일찍이 『대학』에 담긴 뜻에 따라 4장(章)의 「물재가(勿齋歌)」란 노래를 지어서, 벽에 걸어놓고 드나들 때 보면서 자신을 반성하였다. 그러므로 만년에 자기 호를 ‘물재(勿齋)’, 또는 ‘사물재(四勿齋)’라고 하였다. 성종이 『논어(論語)』의 ‘충서(忠恕)의 도(道)’를 물었을 때 임금은 인(仁)과 서(恕: 용서)의 마음을 가지고 정사를 처리해야 하며, 신하는 충(忠)과 후(厚: 후덕)의 정신을 가지고 임금에게 간언(諫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글과 그림에도 뛰어났다. 붓을 들기만 하면 마치 물이 흐르듯이 글을 써내려갔는데, 애초에 아무런 구상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지로는 문장의 뜻이 아주 정교하고 치밀하였다 한다. 그는 그림도 잘 그렸는데, 특히 대나무 그림에 능하였다.
문집으로 『물재집(勿齋集)』이 남아 있다.
[성품과 일화]
손순효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성품은 순박하고 성실하며, 도량은 넓고 컸다. 마음가짐이 어질고 너그러워서, 마음에 속된 기운이 없고 천진(天眞)하였다. 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는 겸손하고 인자하여 부드러운 기운이 가득하였지만, 기상이 늠름하였으므로 상대방이 감히 그를 범할 수 없었다. 그는 자손들에게 경계하기를, “우리 집안은 한미(寒微)한 데에서 일어나서 가문에 전할 만한 보물은 없다. 오직 청렴결백만을 전하더라도 족할 것이다.” 하였다. 한 번은 그가 술에 취해 드러누워 손으로 자기 가슴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 안에는 어떠한 더러운 것도 없다.”고 하였다.
그는 의복과 음식, 주거에는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검소하였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그가 손님을 접대할 때에는 술과 안주를 내놓지 않은 적은 없었지만, 다만 볶은 콩[黃豆]이나 쓴 나물[苦菜], 혹은 솔잎싻[松芽]뿐이었다고 했다. 높은 벼슬에 올라가서도 조용하고 겸허하기가 포의지사(布衣之士) 때와 같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신선(神仙)의 풍채와 도인(道人)의 골격을 가졌다.”고 칭찬하였다. 그는 성질이 호방(豪放)하여 항상 말술[斗酒]을 즐겼는데, 술에 취하면 호탕한 말을 그치지 않았다. 중국 송나라 엄삼(嚴參)의 삼휴(三休)와 송나라 손방(孫昉)의 사휴(四休)라는 호를 합쳐서 스스로 자기 호를 ‘칠휴거사(七休居士)’라고 일컬었다.
『실록』에서 그의 「졸기」에는 그가 때때로 한밤중에 북쪽 하늘을 향하여 이마를 조아리며 맹세하기를, ‘결단코 인군을 속이지 않겠습니다.’ 하였고, 그는 취중의 말이라도 반드시 ‘임금님을 그리워합니다.’라고 하면서 혹은 울기까지 하였다고 했다. 또 그가 각 도에 관찰사로 나가 있을 때에 항상 서울을 향하여 절을 하니, 사람들이 혹시 ‘정상이 아닌 사람인가’ 하고 의심하기까지 하였다고 했다.
그는 임금에게 거리낌 없이 직언(直言)하는 용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성호(星湖) 이익(李瀷)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다음과 같이 그 일화를 소개하였다. 손순효가 술이 취해서 탑상(榻床) 위로 기어 올라가 성종의 앉은 용상을 어루만지고, 눈물을 흘리면서 성종의 귀에 입을 대고 낮은 목소리로, “이 자리를 동궁에게 주기는 아깝습니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깜짝 놀라서 “무슨 말입니까?” 하고 묻자, 성종이 웃으면서, “나의 술과 호색을 경계하는 말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익은 이 일화 끝에 “성종이 임금으로서 신하를 감싸준 것도 훌륭하지만, 손순효도 신하로서 직언을 올리는 데 거리낌이 없었던 것도 훌륭하였다.”라고 그를 칭찬하였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묘소는 충청도 충주(忠州) 산척(山尺) 송강리(松江里)의 묘원에 있는데, 그의 제자 극암(克庵) 이창신(李昌臣)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 부인 평산신씨(平山申氏)는 사헌부 감찰 신자의(申子儀)의 딸이고, 장령 신정리의 손녀인데, 자녀는 5남 1녀를 두었다. 차남 손주(孫澍)는 문과에 급제하여 의정부 좌참찬을 지냈으며 5남 손부(孫溥)는 문과에 급제하여, 영천군수(永川郡守)를 지냈고, 1녀는 사헌부 감찰 윤파동(尹坡童)의 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