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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36년(세종18)∼1504년(연산군10) = 69세]. 조선 전기 세조~연산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시좌(時佐)이고, 본관은 창녕(昌寧)인데,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형조 참판 성순조(成順祖)이고, 어머니 전주이씨(全州李氏)는 동지총제(同知摠制) 이난(李蘭)의 딸이다. 중추부(中樞府)지사(知事)성엄(成揜)의 손자이고, 형조 판서 성건(成健)의 형이다.
[세조~성종 시대의 활동]
1456년(세조2) 사마시에 합격하고, 1459년(세조5) 식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가 정자(正字) · 저작(著作)이 되었고, 승정원 주서(注書) · 성균관 주부(主簿)를 거쳐, 1464년(세조10) 이조 · 병조의 좌랑을 역임하였다. 1469년(예종1)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되어 직언하다가 파직이 되었는데, 예종이 특별히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에 임명하였다.
1470년 성종이 즉위하자, 다시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사간원 사간(司諫)에 임명되었다. 이때 그는 글을 올려 시정(時政) 17조를 논하였는데, 그 내용이 매우 간절하고 정직하였으므로, 성종이 가납(嘉納)하고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대사간(大司諫)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그는 호군(護軍)오백창(吳伯昌)이 권문(權門)에 아부하여 재상의 지위에 오른 것을 탄핵하다가, 대신에게까지 그 말이 미쳤는데, 성종은 성준이 충직(忠直)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대신을 다치게 하지 않으려고 성준과 오백창을 모두 파직하였다. 1473년(성종4)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3년 상례를 끝마치고 1476년(성종7) 이조 참의에 임명되었다. 이어 1477년(성종8)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상례를 끝마치고 1479년(성종10)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이때 성종에게 사조(辭朝)하자, 성종은 “경이 대사간이 되었을 때 나는 경이 충직하다는 것을 이미 알았고, 경도 또한 나의 뜻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항상 이러한 마음을 간직하여 끝까지 변함이 없어야 한다.”라고 타일렀다. 1481년(성종12)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에 발탁되어, 좌부승지(左副承旨) · 우승지(右承旨)를 거쳐,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 형조 참판에 임명되었다가, 중추부 동지사로 옮겼다. 이듬해 세자 우부빈객(右副賓客)을 거쳐, 오위도총부 부총관(副摠管)에 임명되었다. 1484년(성종15) 한성부 우윤(右尹)을 거쳐, 종2품상 가정대부(嘉靖大夫) 병조 참판에 임명되었다가, 경기도관찰사로 나갔다. 1485년(성종16)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 형조 판서에 임명되어 세자 좌빈객(左賓客)을 겸임하였고, 이듬해 영안도관찰사(永安道觀察使: 함경도관찰사)로 나가서 영흥부윤(永興府尹)을 겸임하였다. 1488년(성종19)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저택을 크게 신축한 임사홍(任士洪)을 논박하였으며, 얼마 안 되어 이조 판서로 옮겼다. 1490년(성종21)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으로 승진하여 오위도총부 도총관(都摠管)을 겸임하였고,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표문(表文)을 받들고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가서 효종(孝宗) 홍치제(弘治帝)의 생신을 축하하고 돌아왔다.
[여진족 우디케의 정벌]
1491년(성종22) 여진족 우디케 1천여 명이 두만강을 넘어와 조산보(造山堡)를 침범하여 군민(軍民)들을 약탈하고 경흥부사(慶興府使) 나사종(羅嗣宗)을 살해하였다. 성종은 성준을 영안도절도사(永安道節度使)로 임명하였는데, 그는 현지로 가서 5진(鎭)의 근경 여진족을 위무(慰撫)하고 성보(城堡)를 수축하였다. 당시 여진족은 근경의 오랑캐[兀良哈]와 내지의 우디케[兀狄哈]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조산보를 침략한 여진족은 내지 삼림지대에 살던 우디케였다. 성준이 내지 우디케의 정벌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므로, 성종은 조정의 대신들과 의논을 거쳐 허종(許琮)을 도원수(都元帥)로, 현지의 성준을 부원수(副元帥)로 삼아 2만 4천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만주의 내륙까지 깊숙히 들어가서 우디케를 정벌하게 하였다.
김종서(金宗瑞)의 ‘제승방략(制勝方略)’ 체제에 따라서 전원장(前援將)을 맡은 성준은 선발 부대를 이끌고 최북단 울지령(鬱地嶺) 위에 주둔하였다. 울지령은 지금 만주의 동북 삼림 지역 장광재령(長廣才嶺)으로 추측된다. 1479년(성종10) 명나라가 파저강(婆猪江: 동가강) 유역의 건주위(建州衛) 오랑캐를 정벌할 때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여 윤필상(尹弼商)과 어유소(魚有沼)가 5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오랑캐를 협공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두만강 건너 우디케 정벌은 압록강 건너 오랑캐 정벌보다 훨씬 힘들고 어려운 싸움이었다. 자칫하면 정벌군이 울창한 삼림 지대에서 우디케의 습격을 받아서 패배할 위험성이 아주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성준의 정벌군은 우디케를 정벌하여 크게 성공을 거두었으므로, 그 이후에는 여진족이 감히 조선의 국경을 침입하여 분란을 일으키지 못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 직전에 파저강 부근의 흥경노성(興京老城)에 살던 오랑캐 대추장 누르하치가 조선의 국경을 침범하기 전까지 약 1백 년 정도 국경 지방에 평화가 유지되었다. 한편, 당시 북병사(北兵使: 함경도절도사) 이일(李鎰)은 누르하치의 본거지를 정벌하라는 조정의 명령을 고의로 지연시켰는데, 이것은 나중에 누르하치가 <임진왜란>을 틈타 만주의 오랑캐와 우디케를 모두 통일하여 후금(後金)의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준 셈이 되었다. 성종은 북정(北征)의 노고에 보답하기 위하여, 성준을 종1품하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품(陞品)시키고, 1492년(성종23) 영안도관찰사에 임명하였다가, 1494년(성종25) 병조 판서에 임명하였다.
[갑자사화의 피화]
1496년(연산군2) 의정부 우찬성(右贊成)으로 승진되고,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임명되었다.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서, 김종직(金宗直)과 그 제자 김일손(金馹孫) 등의 사림파(士林派)가 화(禍)를 당하였다. 유자광(柳子光)과 이극돈(李克墩) 등이 김종직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어서 세조를 비난하였다고 무함하였기 때문이었다. 죽은 김종직의 관을 파헤쳐서 목을 베고, 김일손과 권오복(權五福) · 권경유(權景裕) · 이목(李穆) · 허반(許盤) 등을 죽이고, 정여창(鄭汝昌) 등 많은 선비들을 귀양보냈다. 이 때 성준은 이 사건의 추고(推考)를 담당하는 의금부 당상관(堂上官)이 되었는데, 국옥(鞫獄)이 끝난 다음에 그는 승품(陞品)되고, 의정부 우의정(右議政)으로 승진되었다. 우의정으로 있을 때 포악한 연산군을 계도시키려고 세조 때 편찬한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읽도록 권고하였다. 1500년(연산군6) 그는 좌의정(左議政)으로 승진하여 세자사부(世子師傅)를 겸임하였다. 좌의정으로 있을 때 그는 영의정 한치형(韓致亨) 및 우의정 이극균(李克均)과 함께 시폐(時弊) 10가지를 상소하여, 연산군의 난정(亂政)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하였으나 도리어 연산군의 분노만 샀다. 1503년(연산군9) 영의정으로 승진되어 세자사부를 겸임하였다.
1504년(연산군10) 임사홍(任士洪)의 밀고로 연산군은 비로소 어머니 윤씨(尹氏: 제헌왕후)가 폐비(廢妃)된 경위를 자세히 알게 되었다. 연산군은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켜서, 성준 · 이극균을 비롯하여 윤필상 · 한치형 · 한명회(韓明澮) · 정창손(鄭昌孫) · 어세겸(魚世謙) · 심회(沈澮) · 이파(李坡) · 김승경(金升卿) · 이세좌(李世佐) · 권주(權柱)를 ‘12간신(奸臣)’이라고 지목하고 윤씨를 폐비한 사건에 책임을 물어서 모두 극형에 처하였다. 당시 사약을 가져갔던 승지 이세좌는 그 친족도 연좌되어 화를 입었다. 그런데, 그때 성준을 비롯하여 윤필상 · 이극균 · 이세좌 · 권주 5명만 살아 있고, 나머지는 이미 모두 죽었다. 연산군은 살아 있던 성준 등을 군기감 앞에서 능지처참(陵遲處斬)에 처하고 목을 베어 효시(梟示)하였다. 이미 죽은 사람들은 부관참시(剖棺斬屍)하였는데, 무덤에서 관을 파헤쳐서 송장의 목을 베고 골을 부수어 바람에 날려 보냈다. 성준은 당시 영의정으로 연산군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고 하다가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서 가장 큰 화를 입었다. 처음에 충청도 직산(稷山)에 유배되었으나, 연산군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그가 좌의정으로 있을 때 상소한 시폐(時弊) 10가지를 다시 따져 물어보려고 그를 서울로 압송하여 잔혹한 형벌을 더하여 심문하고 능지처참에 처하였는데, 그는 죽음에 임하여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고 오히려 나라 일을 걱정하였다. 성준의 시체는 강물에 내던져졌고, 그 자제들도 모두 함께 죽음을 당하였으며 부인과 딸은 종이 되었고, 그 사위마저 먼 곳으로 귀양 갔다.
[성품과 일화]
성준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천성이 엄하고 굳세며, 정직하고 기품이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그를 가까이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였으나, 그는 사람을 대하거나 사물을 접할 때 온화하고 너그러웠다. 그는 무사처럼 과단성이 있고 소신이 확실하여, 남의 아첨에 현혹되지 않고, 권귀(權貴)에게도 위축되지 않았다. 그는 대간(臺諫)의 직임을 네 번이나 맡았는데, 직간(直諫)하다가 두 번이나 파직 당하였으나, 엄정(嚴正)한 모습으로 조정에 서서 바르게 행동하고 굽힘이 없었다.
성준이 영의정으로 있을 때 연산군에게 직언을 한 일화가 『해동야언(海東野言)』에 전한다. 어느 날 궁내에서 잔치를 베풀었는데, 대신들도 참석한 가운데 기생들이 춤을 추었다. 술에 취한 연산군이 한 기생을 끌어안고 난잡한 행동을 하자, 영의정 성준이 벌떡 일어나서, “노신이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전하는 결코 이런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하니, 연산군이 깜짝 놀라서 그만두었다. 비록 연산군이 음탕하고 포학하였으나, 여러 사람 앞에서 노재상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비문과 추모]
시호는 명숙(明肅)이다. <갑자사화> 때 화를 당하여 무덤이 없는데, 외손자 친구 신용개(申用漑)가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이요정집(二樂亭集)』 권12 「의정부영의정 성공 신도비명(議政府領議政成公神道碑銘)」) 부인 성주이씨(星州李氏)는 공조 참의 이계기(李啓基)의 딸인데, 자녀는 2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성중온(成仲溫)은 도총부 경력(經歷)을 지냈고, 차남 성경온(成景溫)은 공조 정랑을 지냈는데, 1540년(연산군10) <갑자사화> 때 아버지와 함께 화를 당하였다. 외동딸은 사섬시(司贍寺)부정(副正) 한절(韓岊)의 부인이 되었는데, 그 아들 한형윤(韓亨允)은 관찰사를 지냈고, 외조부의 비문을 세워서 그를 추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