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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95년(연산군1)∼1533년(중종28) = 39세]. 조선 중종 때의 유일. 자는 숙옥(叔玉)이고, 세칭 ‘절효선생(節孝先生)’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주거지는 서울에서 파주(坡州)로 옮겼다. 아버지는 대사헌 성세순(成世純)이며, 어머니 광산김씨(光山金氏)는 강화부사(江華府使) 김극니(金克怩)의 딸이자 좌의정 김국광(金國光)의 손녀이다. 대유학자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삼촌이고, 정암(靜巖)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
[기묘사화 때 삭과 축출]
성수종은 일찍부터 높은 재주와 탁월한 행실로 소문이 났다. 19세 때 부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두 형들과 함께 시묘를 하면서 자신들은 죽을 먹으면서 매일 세끼 상식(上食)을 올렸다고 한다. 조광조는 성품이 고매(高邁)하여 쉽게 다른 사람과 교분을 맺지 않는데, 그를 단 한번 보고 곧 학문을 교유하도록 허락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중형 성수침(成守琛)을 따라서 조광조의 문하(門下)에서 수학하였다. 김안국(金安國)이 지은 그의 묘지명(墓誌銘)을 보면, “1519년(중종14) 기묘년 가을에 현량과(賢良科)의 대책(對策)에 합격하였는데, 식자(識者)들은 좋은 인물을 얻었다고 기뻐하였다.”고 하였으나, 『국조방목(國朝榜目)』에 의하면, “1519년(중종14) 기묘년 별시 문과에 병과 2위로 급제하였다.”라고 하였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서는 성수종이 현량과에 “지조가 있다.”고 추천되었으나 급제하지 못하였고, 문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 이후에 삭과(削科)당했다고 하였다. 1519년(중종14) 10월 성수종이 별시 문과에 응시하였는데, 시관(試官)으로 남곤(南袞) · 조광조 · 김구(金絿) · 김식(金湜) · 안담(安曇) 등이 과장(科場)에 들어가서 양쪽으로 나누어 앉아 어느 시권(試券) 하나를 읽어보고 서벽(西壁)의 조광조 등이 ‘이중(二中)’의 점수를 매기려 하자, 동벽(東壁)의 남곤 등이 난색을 보이면서 ‘삼중(三中)’이라고 썼다. 그때 조광조가 그 시권을 보고서 말하기를, “이러한 글은 성수종이 아니면 지을 수 없다.” 하였는데, 결국 성수종은 그 별시 문과에 합격하였다. 조광조가 당세의 쓸 만한 인물을 논할 때에 언제나 성수종을 가장 으뜸으로 꼽았다고 한다. 그가 과거에 합격하자마자, 곧바로 <기묘사화>가 일어나서, 조광조가 죽음을 당하고, 사림파의 중진들이 모두 쫓겨나자, 남곤은 “조광조가 출제 내용을 미리 일러준 것”이 틀림없다고 하면서, 성수종의 합격을 부정이라고 주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수종의 시권은 문맥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글이라고 헐뜯었다. 실권을 잡았던 훈구파의 대신들은 성수종을 조광조와 같은 당류라고 지목하여 과방(科榜)에서 이름을 삭제하고 내쫓았다. 성수종은 과거 합격자 명단에서 지워지고 과거 합격이 취소되었다.
[중종 시대 유일 생활]
1519년 <기묘사화>에서 스승 조광조가 제일 먼저 화를 당하고, 사림파의 많은 인물들이 파직되어 유배되자, 그는 오히려 삭과당한 것을 다행스럽게 여겼다. 그는 벼슬에 미련을 버리고 우유자적(優遊自適)하면서 오로지 글을 읽고 몸을 수양하는 데에 몰두하였다. 이때부터 세상과는 인연을 끊고, 형과 함께 파주의 우계(牛溪)로 옮겨가서 집을 짓고 홀어머니를 모시면서 편안하게 살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재능을 아까워하는 사람들이 그를 벼슬길에 나오게 하려고 그의 복과(復科)를 꾸준히 추진하였다. 1520년(중종15)에도 정사룡(鄭士龍)이 그의 복과를 청하였으나 중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성수종은 그 형 성수침과 함께 파주의 우계에다 집을 짓고 숨어서 세상에 나오지 않았으나, 그들의 높은 재능과 뛰어난 행실은 당대에 견줄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하였다. 사람들은 두 형제를 은일(隱逸)로서 추앙하여 형을 ‘청송선생(聽松先生)’, 동생을 ‘절효선생’이라고 불렀다. 두 사람은 어린 성혼의 인격과 사상 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533년(중종28) 2월 21일 오랜 병으로 죽으니, 나이가 겨우 39세였다. 그의 사후에도 조정에서 그의 복과를 청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의 어머니가 듣고서 말리기를, “설령 복과가 된다고 하더라도 땅속에 있는 내 아들의 넋이 반드시 부끄러워 할 것이니, 제발 그러지 말라.” 하였다. 그 뒤에 선조 초년에 그의 아들 성이(成洱)가 억울함을 호소하여 드디어 복과가 이루어졌다.
[성품과 일화]
성수종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훤칠한 키에 기골(氣骨)이 깨끗하고 빼어나서 범상(凡常)치 않았다. 그는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여, 어릴 때부터 책을 읽으면 바로 대의(大意)를 깨우쳤으며 지향(志向)하는 바가 매우 확실하였다. 그러므로 별로 애쓰지 않고도 날로 학문이 고명(高明)한 경지에 이르렀다. 문장을 지을 때에 옛날 사람들의 법식을 답습하지 않고 스스로 어떤 풍격(風格)을 세우고 생각을 표현하여 힘차게 문장을 써 내려 갔는데, 마치 샘물이 솟아오르듯이 자유롭고 분방하여 누구도 당할 수가 없었다. 그의 시(詩)도 또한 맑고 힘차며 전아(典雅)하였는데, 속된 표현을 쓰지 않았다. 그는 기질이 중후(重厚)하고 도량이 크고 너그러웠다. 성품이 담백하여 특별한 기호(嗜好)가 없었고, 의리에 합당하지 않은 물건은 털끝 하나라도 취한 적이 없었다.
그의 첫째 부인 박씨(朴氏)는 군수의 딸로서 그 집안이 넉넉하였다. 처부모(妻父母)가 사위를 그지없어 사랑하여 자산(資産)을 많이 물려주었으나, 오래되지 않아 부인이 일찍 죽자, 그는 그 재산을 남김없이 모두 처갓집에 되돌려 주었다. 그 뒤에 사인(士人)의 딸 안씨(安氏)와 재혼하여 아들 하나를 두고 병마와 싸우면서 아주 가난하게 살았으나, 결코 남의 재물을 구차스럽게 얻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가 죽었을 때 그 집이 너무나 가난하여 장사를 치룰 비용조차 없었다. 그의 친구 상진(尙震) · 정원(鄭源) · 홍봉세(洪奉世) · 이함(李涵) · 정숙(鄭潚) · 원개(元漑) · 신희복(愼希復) · 허정(許淨) · 안담(安曇) 등이 부조금을 조금씩 보태어 겨우 그의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묘소와 제향]
묘소는 경기도 파주 향양리(向陽里)의 부친 묘소 아래에 있으며, 아버지 후배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이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 있다. (『모재집(慕齋集)』 권13) 첫째 부인 반남박씨(潘南朴氏)는 단양군수(丹陽郡守) 박계로(朴季老)의 딸이고, 둘째 부인 안씨는 사인(士人) 안광범(安光範)의 딸인데, 자녀는 1남을 두었다. 아들 성이(成洱)는 은산현감(殷山縣監)을 지냈다. 영조 때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의 상소에 의하여 직제학에 추증되었으며 경상도 물계(勿溪)의 세덕사(世德祠), 경기도 파주의 파산서원(坡山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