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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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온(成景溫)

서지사항
항목명성경온(成景溫)
용어구분인명사전
분야정치·행정가
유형인물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총론]
[1463년(세조9)∼1506년(연산군12) = 44세]. 조선 전기 성종~연산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사아(士雅).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생부는 영의정 성준(成俊)이고 생모 성주이씨(星州李氏)는 참의 이계기(李啓基)의 딸이며, 양부는 이조 판서 성건(成健)이고 양모 청주한씨(淸州韓氏)는 호조 참의 한전(韓磌)의 딸이다. 사헌부 지평(持平)성중온(成仲溫)의 아우이다.

[성종~연산군 시대의 활동]
1483년(성종14) 진사시(進士試)에 2등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1세였다. 그 뒤에 여러 차례 과거를 보았으나 번번이 낙방하자 생부 성준의 권유를 받고, 음보(蔭補)로 1498년(연산군4) 빙고(氷庫) 별좌(別坐)에 임명되었다. 그때 그는 기어이 과거 공부를 계속하면서 비록 포의(布衣)로서 일생을 마칠지언정 음보로 출신하지는 않겠다고 고집하였다. 그 뒤에 사헌부 감찰(監察)과 호조 좌랑 등을 거쳐, 의금부 도사(都事)에 임명되어 산릉도감(山陵都監) 낭청(郞廳)을 맡았다가, 경력이 부족하여 개차(改差)되었다. 1501년(연산군7) 양부의 부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 살이를 하였는데, 이 시기에 과거 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상복을 벗자,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익찬(翊贊)에 임명되었고 우사어(右司禦)로 승진하였다. 1503년(연산군9) 가을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41세였다. 사마시에 합격한 뒤 20년 만에 대과에 급제한 셈이다. 곧 공조 정랑에 임명되었는데, 당시 생부 성준이 영의정이었므로, 그의 장래가 촉망되었다.

[갑자사화의 피화]
1504년(연산군10) 임사홍(任士洪)의 밀고로 생모 윤씨(尹氏: 제헌왕후)가 폐비(廢妃)된 경위를 자세히 알게 된 연산군은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켜서 성종 때 윤씨의 폐비 사건에 관련된 대신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죽이거나 유배시켰다. 당시 성준은 영의정이었는데, 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10개조의 상소를 올려서 윤씨의 폐비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주장하면서, 사건에 관계된 사람들의 입장을 변론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서, <갑자사화> 때 가장 혹독한 형벌을 당하고 직산(稷山)에 유배되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은 연산군은 성준을 교수형에 처하고, 성준의 아들 성경온과 성중온은 외방에 부처(付處)하도록 하였다. 성준은 유배지에서 잡혀 와 교형을 당하였고, 성경온과 성중온 등 가족 50여 명도 체포되어 당직청에서 곤장을 맞고 심문을 당하였다. 성경온은 그의 형 성중온과 함께 먼 변방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해도(海島)로 이배되었다. 1506년(연산군12) 성준에 대한 노여움이 풀리지 않은 연산군은, “성경온 형제의 죄는 가볍지만, 그 근본을 없애버려야 한다.” 하고, 성준의 자손들을 모조리 죽이라고 명하였다. 그 소식을 듣고, 성경온은 “나의 귀한 생명을 어찌 남의 손에 맡겨서 욕되게 죽을 수 있겠는가?” 하고, 즉시 독약을 마시고 죽었는데, 그 때 나이가 44세였다.

[성품과 일화]
성경온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기개와 도량이 원대하고 용모가 준수하고 위엄이 있었다. 관직에 나아가 직무를 처리할 적에는 공정성을 지키고 흔들림이 없었으며, 성품도 청결(淸潔)하고 방정하여 화기가 항상 넘쳐났다. 평소에 살림살이에는 관심이 없었고 외화(外華)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조용하게 스스로의 삶을 즐겼다. 항상 아버지 성준을 곁에서 모시면서 털끝만큼의 실수라도 발견하면 반드시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고 조용히 간하여서 기어코 이를 고치게 하니, 아버지가 그 아들을 매우 중하게 여겼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광주(廣州) 서쪽 정림산(井林山)의 기슭에 있고, 신용개(申用漑)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이요정집(二樂亭集)』 권14 「정랑 성공 묘갈명(正郞成公墓碣銘)」) 중종 때 홍문관 부제학에 추증되었다. 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종실(宗室) 명천도정(明川都正) 이장손(李長孫)의 딸인데, 자녀는 1남 3녀를 낳았다. 남편 성경온의 무덤 곁에다 여막을 지어 놓고 조석으로 상식을 올리고, 밤낮으로 호곡(號哭)하였다. 중종 때 그 절행(節行)을 가상히 여겨 정문(旌門)하였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이요정집(二樂亭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모재집(慕齎集)』
■ 『명재유고(明齎遺稿)』
■ 『직재집(直齎集)』
■ 『오서집(梧墅集)』

■ [집필자] 이기순